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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9:1~7 2021-04-18
보라 이 사람이로다,  
이제 주님께 예정된 고난의 길은 점점 죽음으로 인도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서 철저하게 불법에 의해 착각한 마귀 사탄의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망의 골짜기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 가신다.

물론 로마의 시민권자에게였지만 죄인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채찍질하는 것은 로마법에도 어긋나는 행동이다.(행16:37)

빌라도는 계속 예수님은 죄가 없어 죽일 수 없는 분이라고 유대인들에게 선언하고 강조하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인류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에 불성실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사악한 의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내어질 수밖에 없음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도 예언된 사실이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마음에 내키지 않는 죄 없는 그것도 하늘로 부터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확인하여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 놓아주자고 설득해보는 빌라도와 이제는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지 않는 한 물러서지 않겠다는 유대인들의 아우성이 빌라도의 관정에 시끄럽게 논쟁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세상의 단면일 수도 있다. 조금은 양심이 있어서 의를 행해보자고 말해보지만 결국 대부분이 불경스러운 세상의 소리에 파묻혀 의나 양심은 설 수 없는 이곳이 바로 빌라도 법정의 확대된 세상의 모습이다.

이 안타까운 세상을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고 이렇게 진리나 생명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주님께서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면 상황과 처지에 관계없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의를 찾아 주신 주님으로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Ⅰ. 무지한 군인들의 희롱(1~3)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군인들에게 내주어 채찍질 당하시게 하는 데 사형판결을 확정한 것도 아닌데 우리 주님은 먼저 철없는 군인들에게 조롱과 채찍을 당하시고 얼굴에 침 뱉음을 받으신다(마26:67, 마27:30; 막10:34). 이것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아시고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바 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눅18:32)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1)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선포했던 예수 그리스도 즉, 죄 없으신 예수님께 채찍질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빌라도의 계산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채찍은 가죽 줄 끝에 날카로운 납이나 쇠조각을 달아 후려쳐서 당기면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는 참혹한 형벌로 십자가 형을 당하기 전의 죄수에게 가하는 형벌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빌라도의 계산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 죽이라고 광기어란 소리를 질러 대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참혹한 채찍형을 가함으로써 저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한 참상을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어느 정도의 연민과 동정심을 일으켜서 그보다 더 잔인한 십자가로 내몰아 가려는 것을 그만두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빌라도 나름대로의 계산을 하였을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는 이러한 주님께 대한 고통의 대우는 정의나 진리를 알지도 못한 이 로마의 관료는 죄가 없음을 확인하긴 했지만 자신의 위치를 어렵게 만들고 힘겹게 하는 피지배국의 문젯거리에 대한 분노를 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이 중에 어떤 이유에서 라도 채찍질은 결코 옳지 않았고 자신의 생각을 반영시키지 못했다.

“군병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2) 금으로 된 왕관 대신에 가시관을 눌러 씌우면 머리뼈에까지 박혀 피를 흘리는 잔혹한 모습은 생각만 해도 섬뜩하지만 군인들은 이런 일을 장난처럼 해대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개념이 없는 사람들임을 본다.

물론 자색 옷은 당시의 왕들이나 귀족들이 입는 옷이었지만 이것 역시 가시관을 쓰신 주님께 입힌 것은 어울리지 않은 조합으로 그것이 더욱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3) 빌라도의 관정 안이라는 데서 이 군인들은 로마의 군인들임에 틀림이 없고 불신의 군인들은 역시 피지배국의 종교지도자라는 이유에서 더욱 비아냥거리고 모욕하는 것을 자신들의 승리의 모습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특히 “앞에 가서” 즉, 얼굴 앞에 다가가서 조롱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유대인들이 평상시 인사로 “샬롬-평안을 빈다.”였지만 로마인들도 사실 같은 의미의 인사말을 사용하였다. “εἰρήνη” 그러나 여기에 쓰여진 평안을 이 “에이레네!”가 아니라 “χαίρω[인사할 때도 사용하지만, 유쾌하라, 행복하라]”는 의미의 축하의 표현이다.

최고의 굴욕스러운 모습으로 꾸며 놓고 축하한다는 조롱이야 말로 극에 달하는 모욕을 주는 것이다. 특히 “손으로 때리더라”는 표현은 손바닥으로 철석 소리가 나게 뺨을 치는 것을 묘사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어떤 것으로 때리는 것 보다도 모욕감을 주는 행동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수치와 모멸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생각없이 행동하는 이방의 군인들에 의해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는 바울 사도의 표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이방 총독에게 죽여 달라는 함성을 들으시면서 사실 혈육적으로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나 이해관계도 없는 로마의 군인들로부터 사람으로도 받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시는 모습이다. 왜, 이런 사람으로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모멸을 당하셔야 했는가! 생각하면 그것이야 말로 내가 나 자신의 죄의 대가로 받아야 할 수치를 대신 받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만 생각하고 헤아린다고 해도 교만할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찌 찬양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머리에는 가시관을 아프게 눌러쓰고 온 몸은 채찍에 맞아 이미 피를 흘릴 대로 흘리고 바라만 보아도 진저리 쳐지는 처참한 모습,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당하시는 주님이야 얼마나 힘겨우셨을까! 탱자나무 하나의 가시에만 찔려도 아려 못 견디는데 깊이 눌러쓴 머리는 이미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주님 섬기는 것으로 당하는 일들을 과연 불평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사야는 이미 영안(靈眼)을 열어 이것을 목격하고 고백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Ⅱ. 빌라도의 두번째 무죄선언(4~5)

이미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18:38b) 하였던 빌라도는 다시 죽여 달라고 정신없이 소리치는 유대 군중들을 향하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죽일만한 죄를 찾지못하였다고 증거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매질하여 바라보기에도 힘들게까지 채찍질하였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람들과 꼭 같이 죄를 짓는 사람이었다면 인류의 죄를 감당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OT의 한 사람의 한번의 죄를 위한 제물로 사용하는 짐승일 찌라도 허물 있는 것은 쓸 수가 없었던 것을 볼 때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는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신 분이셨지만 죄는 없으셨음을 히브리서 기자도 증언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4f) 빌라도 총독은 머리에 눌러쓰신 가시관에서는 선혈이 낭자하고 채찍을 맞은 몸에서도 움직이실 때마다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의 예수님을 유대 군중들에게 다시 끌고 나와 세웠다.

빌라도의 관정은 이미 바닥에 피가 흘러 흥건했을 것이고 이런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빌라도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그 모습을 보는 유대인들은 숨을 죽이고 소리를 멈추었을 것이다. 사실 빌라도는 그것을 기대하고 죄를 찾지도 못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런 모습을 한 “이 사람”을 저들 앞에 세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4b)는 말에는 다소 모순이 보인다. 죄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했다면 가시 면류관이나 채찍질을 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에서 군인들로부터 당한 모습 그대로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그들에 의해서 선동된 군중에게 그대로 보이는 요한 사도의 서술이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f) 라는 내용이다.

다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앞에 세우고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5b) 라고 소개하고 있다. 가장 가까이는 그들이 지금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18:30)라거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18:31) 라고 죽이려 하는 “이 사람을 보라!”는 것이다.

비록 본디오 빌라도는 몰랐지만 온 인류의 저주스러운 죄를 홀로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이 사람을 보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리적 선언일 수도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수없이 “인자[ἄνθρωπος]”라는 표현을 쓰셨다(마23; 막12; 눅21; 요12회). 이것은 침례 요한이 표현하는 대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36)라는 선언에 비교해 볼 수 있다.

빌라도는 단순히 너희들이 살려 둬서는 안된다는 “그 사람”이라는 단순한 의미였지만 “이 사람을 보라!”는 선언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예술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작품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바로 오염되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자 사람의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두시고 “이 사람을 보라!”하셨다면 “적어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라는 모범으로 제시하는 사람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이 사람을 보라!” 하였다면 “적어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이정도의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실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두고 “이 사람을 보라!” 할 때는 바울처럼 우리 모두의 신앙의 목표가 되신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 14) 또 열심히 따라가야 할 성장의 모범이자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미치지 못한다면 누구도 신앙이 성장했다고 자랑할 수 없이 때문에 겸손으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만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빌라도의 “이 사람을 보라!”는 선언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한 말이라기보다 오늘 믿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며 초라하게 종교생활에 만족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목표로서의 도전이다.



Ⅲ. 유대인들의 사악함(6~7)

빌라도의 이러한 계산이나 생각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 달라는 유대인들에게는 통하지 못했다. 죄인들의 특징은 깨닫게 되는 것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이 결심하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6f) 빌라도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만 것 같다. 그래도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질하여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게 보이면 저들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혼자만의 계산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만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은 피를 보면 흥분하여 더 피를 부르는 흉악함이 여기서도 여지없이 나타나고 만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소리는 대제사장의 무리와 그의 아랫사람들이 꼭 같이 소리를 질러 댄다. 범죄로 죽게 된 사람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여 살게 하는 역할이 제사장들의 본분인데 이들의 입에서 사람을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저들의 역할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이들의 모습에 기가 질린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6m)고 오히려 이들과는 너무나 다른 큰 소리로 저들의 안타까움을 질책한다. 저들이 형을 집행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면서도 도리에 맞지 않은 저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간접적인 모습이다.

다시 세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고백한다.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6b) 이것은 적어도 빌라도의 최소한의 양심의 고백이었다. ‘너희들이 죽이라고 하는 이 사람에게서 나는 죄를 찾을 수 없었다.’라는 진실된 3번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그의 판단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 놓아야만 했다. 이런 당연한 사실 앞에서도 왜, 빌라도는 그러지 못했을까? 세상에서 실리적인 사람들은 양심의 소리보다는 자신의 형편이 먼저임을 여기서도 보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7f) 만약에 이 땅에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다면 여전히 그들에게 있었던 법 즉, 율법에 의해서 백성들에게 어떤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본보기로 돌을 던져 죽이게 되어 있었다.

또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b) 라는 행동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죽는 것이 당연하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거스르는 행동은 죽는 것이 맞다.

이런 이유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천사를 보고서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기록들을 더러 볼 수 있다. 사사기에서만 보더라도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리라”(삿6:22~23)하였다.

삼손의 아버지였던 마노아도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삿13:22~23f)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진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라 하시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죽이려는 죄를 범하고 있는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이 문제이다. 오늘도 이러한 오류는 있을 수 있다. 세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오히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고 방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참으로 양심에 화인 맞은 몇몇 사람들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간 큰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가 보다!’ 하고 그렇게 받들고 섬긴 사람들도 있지만[이것은 과거만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결국은 그들의 행위대로 대가를 받을 것이다.

모두가 죄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을 거역할 뿐만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조차도 잃어버리는 사악함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로마의 군인들처럼 오히려 조롱하고 대적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셨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언제나 그 희생을 우러러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빌라도의 입을 통하여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신앙의 모범을 제시하셨고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바쳐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사람 역시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신 것이다.

사실 죽어야 마땅한 사람은 죄를 진 모든 사람들이다. 함에도 범죄자들은 의인을 죽이려 하고 심지어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조차도 죽여야 한다고 소리지른다. 어쩌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치는 그 군중 속에 한 사람이 바로 오늘 나 자신임을 깨닫고 이제는 회개하고 사죄하는 삶을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감당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