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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9:17~24 2021-05-02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전혀 무죄의 상태로 이 땅에 오시고 33년여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형벌을 당하심을 본다. 죽으실 수 없는 이 생명의 주님께서 이렇게 죽으심에도 해골이 뒹구는 죽음의 동산에서 아담이후의 모든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맞으신다.

그것도 두 강도들 사이에 달리셔서 한 강도는 회개시켜 구원으로 데려가시고 한 강도는 여전히 완악함으로 마침내 죄의 값인 그대로 죽어 영원한 저주의 형벌로 내려가고 만다.

비록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 줬지만 역사 속에는 없었던 죄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위에 붙이게 되는데 그 죄 패는 죄명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분을 표기하는 십자가형과 어울릴 수 없는 모습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의인을 죄인으로 처형하는 현장의 철없는 군인들은 정의나 진리나 생명과는 관련이 없는 그야말로 십자가형에 고통 당하는 소리와 붉은 피가 떨어지는 바로 그 밑에서도 모든 것을 오락거리로 삼고 즐기려는 안타까움을 본다.

사람들이 인위적인 오락을 찾아 즐기는 것도 자신의 인생이나 일터의 무료함과 이 세상에 진정한 기쁨이 없는 이유에서 오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범죄로 인하여 인생의 희락을 잃어버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철없는 군인들과 같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도 오락실이 성황을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모든 일들이 결국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과 예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데서 신비감을 가지게 된다. 주님의 삶 자체에서의 예언의 성취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움직이시는 모든 곳에서 “이는 성경이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는 구원의 신비한 역사를 감탄하게 한다.



Ⅰ. 생명의 주께서 해골의 곳으로 가심은(17~18)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b)라는 거짓 충성을 고백하고 드디어 저들은 자신들의 원하던 대로 예수를 죽이기 위해 넘겨받고 신속히 그 일을 행하려 한다. 여기 유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예수께서 선택된 민족이요 나라인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παραλαμβάνω) 아니하였으나”(11)라는 안타까움을 보았지만 생명의 주님을 그 생명으로 영접하지 못하고 죽이기 위해 영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παραλαμβάνω)…”(17f)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반응은 이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함께 영생을 누리든지, 불신으로 죽이는데 동참하므로 예수를 죽이는 죄를 짓고 영원한 어두움으로 가든지 이 역사 속에 난 사람들의 운명은 이 두가지로 갈릴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17) 대부분의 십자가형은 달릴 사람이 그 십자가를 지고가는 일이 일반적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의 동산으로 올라가셨다. 이는 마치 모리아산을 향해 자신을 번제로 태울 장작을 짊어지고 가는 이삭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미 머리에 가시관을 눌러 씌우고 채찍을 당하여 피를 많이 흘린 까닭에 힘이 모자라자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15:21; 마27:32; 눅23:26)라는 모습을 공관복음들도 전달해 주고 있다.

빛과 생명을 지으신 주인, 즉 죽음과는 관련이 없으신 주님께서 사람의 범죄로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 죽음이 충만한 해골(גֻּלְגֹּלֶת, κρανίον, Calvaria)이 뒹구는 죽음의 동산으로 들어 가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히2:14b)기 위해서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특별한 표현이 해골의 동산으로 나아가시는 것은 안나스에게(18:13) 또는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려가셨던(18:28) 표현이 아니라 “나가시니”라는 표현이다. 이미 10:18에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셨던 주님은 죽음에까지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라는 예언의 성취를 위해 끌려 오셨지만 이제는 죽음을 향에 당당히 나아가신다.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18f) 결코 아무도 바라지 않는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양 손과 발에 못이 박혀 높이 들려 지신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영광스러운 죽음은 땅에 잘 묻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무에 달리는 죽음은 저주받은 사람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다. 모세를 통하여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b) 말씀하셨다.

그러한 사실적인 예를 보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하나님을 불순종한 것으로 인하여 길보아산에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박는다(삼상31:10).

에스더서에서는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던 하만이 세운 22.5M높이의 나무에 자신이 달려 죽고(7:10) 다시 그의 열 아들이 모두 죽인 후에 나무에 달린다(9:1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높이 들리실 것을 말씀하신 바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 예수께서 인용하신 내용이 민수기21:8인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셨고 v9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기록되고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높이 들려 만인에게 알려져야 하고 대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해야 한다.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모든 사람이 그 죽음의 저주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의 첫 날, 즉 부활의 승리의 날에 그의 죽으심을 하나님 앞에 기념하며 예배를 드린다(행20:7; 고전11:26)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8b)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도 혼자가 아니셨다. 공관복음에 기록된 대로 강도 두 사람을 좌우에 함께 처형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강도와 같은 취급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요한은 이미 이 사실이 1세기말렵에는 대부분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이 내용을 간략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우연이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두 강도는 이 역사 속에 난 모든 사람들의 대표격이다.

한 강도는 비방하고 함께 조롱했지만(눅23:39) 그 중의 한 강도는 그 다른 강도를 꾸짖고 자신들은 죄로 인해 형벌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옳지 않음이 없으시다고 말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거억하소서”(42) 회개하여 천국백성이 된다.

세 사람이 함께 십자가위에 처형을 당하고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꼭 같은 죄인인 것으로 보였지만 한 분 그리스도는 전혀 죄가 없으신 분으로 죄인취급을 당하시는 것은 사실 온 인류의 죄를 모두 짊어지셨다는 데서 가장 죄가 많으신 분으로 죽으신다.

다른 두 강도는 그들의 죄값으로 당연히 형벌을 받는 사람들이지만 한 사람은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자신의 죄를 함께 못박히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맡김으로 의인이 되었고, 한 강도는 자신이 지은 죄는 물론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함으로 자신의 죄를 그대로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비교되는 그림을 하나 생각하면 민수기16장의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으로 그들이 다 죽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41)라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다. 그러자 다시 하나님의 진노로 백성들에게 염병이 번지고 모세가 아론에게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하여 염병이 치료되기 시작했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48)는 표현이 있다.

이런 입장에서 죄의 해결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자의 사이에 서신 주님의 십자가인 것이다.



Ⅱ. 히브리, 로마, 헬라 말로 기록된 왕(19~22)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변 상황을 요한 사도는 찬찬히 소개하고 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들의 죄명을 십자가 위에 붙이게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예수 그리스도의 달리신 십자가위의 패가 빌라도와 유대인들과의 시비 거리거리가 되지만 이것에는 빌라도가 양보하지 않는 것 또한 독특하다.

죄 없이 죽으시니 죄 패가 있을 리 없고 그 죄 패라고 붙인 것이 죄명이 아니라 주님의 신분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서 유대인들의 심기(마음)를 상당히 불편하게 하였던 것 같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19)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왕]은 바로 메시아 즉, 그리스도의 대명사이다. 이 사실을 자신의 정치생명에만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빌라도가 알고 있었을까 의문이지만 하나님은 이 이방 총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선포하는 샘이다.

그것도 유대인들에게만 [유대인의 왕]이라는 증거가 가능하면 될 것이기 때문에 히브리어로만 기록하면 되겠는데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20)라는 사실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 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이 빌라도의 의도이거나 유대인들이 바라던 것이 아닌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 죄패에서조차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어는 삼 개국어로 기록하였다는 사실은 세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온 인류를 위해 희생되심을 이해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는 종교의 대표였다면 로마는 정치의 대표로 그리고 헬라는 철학과 문화의 대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것을 보고 마음이 뒤틀린 사람들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21) 자신들의 하는 일들에나 권위에 어려움을 일으키고 쓴 소리 하는 것이 기분 나빠 십자가에 죽게는 하였지만 사실 개운치 못하고 무엇인가 찜찜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십자가의 패에까지 이렇게 쓴 것에 마음이 많이 쓰였던 모양이다.

자신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표현이 “자칭 유대인의 왕”라고 빌라도에게 고치라는 요구해보지만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22) 여기서는 빌라도가 태도를 바꾸지 않는 모습을 본다.

대제사장들과 선동된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할 때는 그것을 받아들여 사형집행을 판결해 놓고 그보다 작은 이 일에는 오히려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우기는 모습이 안타깝다. 물론 이렇게 된 상황에서 이 죄 패를 쓴 것은 어쩌면 자책에 대한 작은 위로일 수도 있지만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은 여기서도 나타난다.

바울 사도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0~11) 고백한다.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죄를 해결 받은 믿음의 사람들마다 그 벗겨진 의의 옷으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새롭게 창조하신 이의 모습을 회복하고 생각과 지식에 까지도 새로워짐을 입은 자라고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역사 속에 한번도 없었던 죄명이 아닌 신분을 쓴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 패 [유대인의 왕]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과 탄생과 근거지인 히브리어로만 쓰여지지 않고 당시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삼 개국의 언어로 쓰여진 속에는 오늘 대한민국의 우리의 구속(救贖)과 왕 되심도 그대로 보이시고 있고 우리 각자인 [나]를 위한 희생이심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믿으시기를…!



Ⅲ. 주변의 일까지도 성경을 응함(23~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은 그 죽으심의 주변에서조차 증명되고 검증되는 것을 요한은 놓치지 않고 우리에 전달해 주려고 애씀을 이곳에서 도 이해하게 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극도의 수치심을 느끼도록 그의 입었던 옷은 모두 벗김을 당하고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벗겨진 옷들은 철없는 로마 병사들의 오락거리가 되고 있음을 오늘 마지막으로 보게 된다. 죽음의 한가운데서도 자기의 소유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이 군인들에게서 보게 된다.

주님께서 잡히기까지 입으셨던 옷이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4사람의 군인에 의해서 나눠지는 이야기인데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의 이루어짐이라는 데서 신비와 감사를 드리게 된다.

왜냐하면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이고 보이는 옷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으셨던 영광의 옷을 벗어 그 옷으로 우리를 입히시는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이 사실을 증거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23f)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에 걸쳤던 것들이 모두 다섯개인 것 같다. 그것은 겉옷이 머리 수건으로부터 4개를 나누는 데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 문화 속에서는 고인이 세상에 살 때 입었던 옷은 과거에는 불에 태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그 죽은 사람이 다시 입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지금은 필요한 사람들이 나눠 입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군인들은 이것을 얻는 것을 어쩌면 귀하게 여겼던 것 같고 심지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 패가 아닌 죄 패를 붙인 이 사람의 신비감도 가진 것 같기는 하지만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십자가 밑에 그것도 달린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귀에 들릴 터인데 이런 일을 하는 것 조차가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물론 옷을 바꿔 입힌 후에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질을 하였지만 그 옷에 피가 묻지는 않았을 까도 생각하게 한다.

옷 한 깃씩을 나눠 가졌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통으로 짠 속옷이 하나이기 때문에 제비 뽑는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다.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23b) 특히 이것은 몸에 직접 닿았던 옷이라 조금은 경계심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군인들은 어느 정도 이것을 오락거리로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24f) 군인들은 머리를 쌌던 수건으로부터 겉옷을 하나씩 나누고 기운 것이 없이 통으로 짠 속옷을 어떤 방식이든지 제비뽑기로 이긴 사람이 가지자는 그럴듯한 제안을 하는데 혹시라도 덧대어 기운 것이었더라면 그 기운부분을 뜯어서 나눌 기세로 보인다.

그럼에도 신앙의 사람인 요한은 이것에서 조차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영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무엇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은 그 보는 사람의 세계관에서 결정됨을 여기서도 배운다.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24m)

사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은 그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탈출해 보고자 자신들이 입었던 옷을 내려다보고 있을 사형수들의 옷을 나누는 것조차 오락을 삼고 있지만 이 세속적인 모습에서도 사도 요한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예언 성취를 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시편22:18의 이 말씀은 사실 다윗이 곤고와 환란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하소연으로 후일에 십자가에 고난당하실 메시아의 모습을 여러 부분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24b) 계속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군인들에게 이것도 취미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서든지 자신의 원하거나 좋아하는 소일거리를 찾게 되는데 요한 사도는 로마의 십자가 형장에 어울리지 않는 군인들의 이런 모습을 거르지 않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24b)이다.

오늘 날 만큼이나 인권이니 주권이 말로는 강조되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이 성결하지 못하다면 요한 사도의 표현과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예배와 모임에서도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할 수도 있다는 경계로도 들린다.

전혀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 흠과 티가 없으시고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동산, 해골의 동산으로 나아가 죽으심은 오늘 바로 우리(나)를 해골과 죽음이 충만한 저주에서 빼내어 자유 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다.

비록 당시의 총독인 빌라도에 의해서이지만 골고다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는 죄 패가 아닌 [유대인의 왕]이자 [인류의 왕]이라는 주님의 신분의 표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도록 세가지 언어로 쓰여져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임을 알아보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에 이루어지는 일들조차도 낱낱이 성경을 이루어 그분이 인류의 메시아이자 나의 그리스도 되심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제는 죽음을 가지고도 오락하는 군인들과 같은 자세를 버리고 온전히 순종하고 전하여 나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끼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