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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20:1~10 2021-05-23
그들은 성경에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오늘 제목의 어법이 조금 이상하게 보인다. 본래 v9의 내용에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빼고 그것으로 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요한복음의 절정에 이르렀다. 이러한 내용들을 이 20~21장에서 나누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많은 이적과 죽음 조차도 이 부활이 없었다면 또 하나의 신화에 그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종교나 철학도 흉내 낼 수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부활이 지금까지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과 사역과 죽음의 절정인 것이다. 이 부활이 있으므로 앞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증거해주고 있다.

또 공관복음의 부활에 관한 기록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깊은 관찰자인 요한 사도만의 갈릴리 쪽이나 다른 기록들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유대에서의 사실들을 어느 누구 보다도 자세히 그리고 호소력 있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기록한 요한일서에 표현하는 것처럼 더욱 분명하게 영육으로 확인된 사실임을 증거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OT의 이미 이루어진 언약들과 진행되어지고 있는 약속들이 있는가 하면 앞으로 이루어질 약속이 모두 기록되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이 언약의 책인 성경 속에서 가능하고 그것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 성령께서 그분을 순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이런 입장에서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찾는 것의 경계는 오늘 본문의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는 말씀이다. 이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주님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자들조차도 아직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같은 병행구절인 누가복음에서 이미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찾는 여인들에게 했던 천사들의 말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24:5)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에 발라 주기위해 향품을 준비해서 이른 아침에 무덤에 갔다가 이런 책망 같은 말을 들은 것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무덤 밖에 계시는데 여인들이나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속에 누워 계시다고 생각하고 기쁨이 아니라 슬픈 마음으로 찾고 있으니 현실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신앙의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 지 모를 일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들과 여인들이 이랬으니 우리는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믿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는 당시의 제자들과 여인들보다 더욱 확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성령은 오셨고 어떤 신앙의 사실도 감춰져 있지 않고 열려 있기 때문이다.

즉, 성령의 깨달음과 역사로 그 때보다도 더욱 분명히 주님을 알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제자들을 흉볼 수 없고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을 비웃을 수 없고 오히려 우리 스스로의 깨달음의 모자람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오늘의 제목처럼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 한 믿음의 출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여기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하신 말씀을 알지 못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성경에 …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는 어두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는 얼마든지 다른 내용을 바꿔 넣어볼 수 있다. “성경에 근심하지 말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또는 “성경에 세상을 사랑치 말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성경에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성경에 겸손 하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어떤 것을 다 넣어도 있을 수 있고 어떤 부분에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부분에는 아직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을 수 있을 때 생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찾는 종교생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우리 각자 자신들에게 “성경에 …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는 부분을 찾아 생명으로 회복하는 말씀이 되었으면 하는~



Ⅰ. 무덤을 찾아간 세 사람(1~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을 다루는 첫 시간부터 너무 부정적인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고서야 비로소 신앙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입장에서 지난 시간에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다는 내용을 다룬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부활의 영광을 확인하지 못하고 여전히 죽은 시체를 찾고 있는 안타까움은 반드시 생명으로 회복해야만 한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1) 남자들도 찾아가는 것을 꺼리는 무덤에 아직도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새벽에 무덤을 먼저 찾아 간 것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

유대인들은 우리와 다르게 하루의 시작을 저녁 해질 때이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부지런한 사람들은 새벽에 일어나 활동하고 그 활동으로 오히려 새벽을 깨우는 표현도 볼 수 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역사도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수6:15f) 시작하였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b, 108:2b) 선언하고 있고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b) 라는 찬양처럼 출애굽기14:27에는 마른 땅같이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을 뒤쫓아오는 이집트의 군대를 하나님은 새벽에 수장(水葬)시키시는 일도 이 중 하나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귀신을 쫓아내 주신 너무나 큰 사랑을 입은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먼저 주님의 시신에 향료라도 발라드릴 양으로 아직 어스름한 새벽에 이 죽음들이 즐비한 무덤을 찾아 가는 것으로 주님께 대한 감사를 나타내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1b) 무덤에 도착하자 말자 막달라 마리아가 확인한 것은 무덤입구에 막아 두었던 돌이 옮겨진 것을 본 것이었다. 그 무덤안을 확인해 본 것도 아니고 자신이 확인한 것을 두 제자에게 알리기 위해서 달려가서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

그 제자들에게 알린 내용이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b) 이 말 자체가 부활하셔서 스스로 움직이시는 주님은 상상도 못하고 아직도 누군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시는 시신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성경에 …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는 믿음은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판단하고 상상하는 것을 행동하는 막연한 것이다. 그런 것은 이렇게 적극적인 행동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여전히 비생산적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수없이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17:9b) 하신 말씀조차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막9:10) 하는 것으로 봐서 부활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b) 라는 생각은 대단히 막연한 것이었다. 과연 ‘무덤에서, 누가, 어디에’ 옮겼다는 말인가! 그 발상 자체가 막연하고 허망한 상상이다.

오늘 우리 역시 성경의 약속을 따른 믿음이 되지 못하면 이렇게 행동은 있는데 그 행동자체가 허망하고 텅 빈 생각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하는 데서 “성경에 …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는 믿음은 경계되야 만한다.



Ⅱ. 이미 정리되어 있는 무덤 속(3~7)

무덤을 맨 먼저 찾아 갔던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고 이런 온전하지는 못하지만 사랑에 보답할 양으로 움직이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역시 부활하신 예수께서 맨 먼저 보이셨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막16:9)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는 물론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간 그 순간에 주님께서 바로 부활하신 것은 아니고 이미 부활해 계신 상태에서 장례때의 잔재들이 남아 있는 그러나 너무나 질서정연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3) 여기 베드로와 함께 거론되는 “그 다른 제자”는 물론 본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전갈을 받은 두 제자는 머뭇거림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장사 지냈던 무덤으로 향한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4) 그 아침부터 달리는 모습이 계속 나타난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두 제자에게 알리려고 막달라 마리아가 달려가 말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두 제자 역시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라고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이가 많아 성미는 급했지만 달음질은 아마 요한보다 빠르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4)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전갈을 들은 두 제자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여기 표현대로 “더 빨리 달려가서”라고 쓰고 있다. 그것이 살아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잃어버린 시신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도 요한이 무덤을 대략 들려다 본 모습을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5) 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성미 급한 베드로는 머뭇거릴 것도 없이 무덤에 오자 말자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6) 라고 공통적으로 본 것은 “세마포 놓인 것”이었다.

여기에 추가해서 베드로가 들어가 본 것은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7) 하여 무덤 속의 질서 정연한 모습을 그대로 전달해 주고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해 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바위속에 파 둔 무덤 속에 시신을 안장(安葬)해 뒀다면 11장의 나사로의 경우처럼 부패하기 시작하여 냄새가 나고 막달라 마리아의 생각과 같이 누군가가 시신을 옮겨갔다면 보이는 모양에서도 이렇게 정돈되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무덤에서조차 생명의 질서는 정연함을 보는 것이다. 어두움은 언제나 혼돈하고 공허하지만 하나님의 만드시는 창조의 역사나 생명은 분명한 질서를 유지하고 깨끗함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

어찌 보면 태초에 창조의 모습이 무질서와 공허에 질서를 만드시는 것으로 창조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1~3) 물론 이런 모습에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소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 섬기던 3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먼저 찾았지만 저들은 평소에 죽음가운데서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하지 못하고 시신을 잃어버린 정도로 허탈해했던 모습뿐이었다.

이 원인은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도 없이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는 안타까운 믿음 때문이었다. 그동안 주님을 가까이 따르면서 수많은 영적인 진리를 듣고 확인하면서도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오늘 우리의 신앙 역시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참으로 들어야 할 사죄의 감격과 모든 죄악됨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위안과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으로만 예배하고 신앙한다면 이 부활의 영광을 확인하지 못하는 제자들처럼 영광의 아침을 절망과 탄식으로 맞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Ⅲ. 보고 믿더라(8~10)

이 마지막 부분도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내용과는 조금 다르게 사실적인 이해를 해보는 것도 하나님께 불경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v8의 내용을 너무 신앙적으로만 이해 하려다 보니 다음절과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이 나머지 3절 속에서는 아직도 막달라 마리아나 요한과 베드로 두 사람의 제자들 모두는 물론 나중에는 믿고 기뻐했지만 믿음의 확신을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행되는 행동들이 믿음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데서 그렇다.

이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하고 있는 요한의 증언은 자신들의 진실된 믿음의 부족을 오히려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8) 어찌 보면 이 말씀이 관건이 되고 있다. 베드로는 무덤에 도착하자 말자 두려움이나 또 다른 생각없이 무조건 들어가 놓고 확인을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면을 보다 자세히 관찰한 요한은 베드로를 따라 들어가 보고서야 주님께서 무덤에 없어졌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8절의 “들어가 보고 믿더라”는 표현을 부활을 믿었다고 단정한 나머지 다음 구절의 이유를 나타내는 ‘왜냐하면’이라고 연결할 때 주로 사용되는 [γάρ]라는 낱말을 다른 형태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지 못하다.

앞에서 언급할 대로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2b)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주님의 시신의 여부를 확인하는 이들의 모습으로 이 내용을 이해한다면 적어도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이해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 한 것처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확신했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2b)는 오해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으로 무덤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함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이 말씀에서의 이해는 “아직 알지 못하더라”는 표현으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표현인 것이다. 마치 사도행전8:16의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 라는 말씀과 같은 표현이다. “아직” 그때까지는 부활의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반드시 알게 되리라는 의미를 분명히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v8~9의 무리 없는 이해는 ‘무덤에 찾아 갔던 이 세 사람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들어가 확인하고야 믿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자 자연스럽다.

오늘 마지막 표현도 앞의 이러한 내용들을 뒷받침하는 모습이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10) 만약에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한 상태였다면 가만히 집으로 돌아갔을 리가 없고 흥분의 감격으로 이 사실을 그들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였을 것이라는 이해는 어렵지 않다.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11)라는 내용도 아직 부활을 확신하지 못한 단적인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실을 확신했다면 계속 무덤안을 들여다보며 울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아직 부활을 예언한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확인하지 못하고 그 부활이 이미 이루어진 상황이었음에도 적어도 그때까지는 아직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상태를 가감없이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셨음에도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했다면 그래도 이해가 가능하겠는데 여전히 죽어 있는 시체를 찾고 확인하는 모습은 역시 영적이지 못한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는 한가지 원인이었고 이것 또한 역사 속에 수없이 반복될 수 있는 모습이다.

이 진실된 기록은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에게 가능성을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성경에 …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는 기록은 당시에 제자들이 그랬지만 나중에는 확신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전하며 영광을 돌렸다는 데서 같은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한계는 있다. 그때는 성령의 임재 이전이지만 지금은 약속은 이루어졌고 믿을 만한 증거를 모두에게 주셨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나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시기의 한계가 있는 것이고 이 일은 언제 이루어질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서론에서도 몇 가지의 예를 들었지만 이 마지막 시대의 경계는; “성경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또는 “성경에 게으르지 말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성경에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는 비극의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란다.

그렇지 못하면 주님의 영광된 부활의 사실 앞에서도 여전히 생명 없는 어떤 것을 확인하는 것을 찾아 달음질하는 분주함으로 에너지를 다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