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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20:21~31 2021-06-06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어디 귀중하지 않은 말씀이 있겠는가 만은 이 부분은 참으로 귀중한 약속을 여러 부분에서 본다. 본래 오늘의 도입부분은 v19~ 한 마당의 연장이다. 평강을 주시고 세상을 향해 가라고 하시는 명령과 함께 그 동력으로서 성령을 약속하시고 성령의 사람들에게 사죄의 약속까지 확인하신다.

못에 박히셨던 손발과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까지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지만 그것을 함께 보지 못했던 도마에게 다시 확인시키시는 은혜도 감사하다. 역시 여기서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당부는 너무나 귀중한 말씀이다.

보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인류의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뵐 수는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하시는 주님의 기대와 함께 보지 않고도 믿게 하려고 이 복음서도 요한이 쓰고 있다는 격려를 마지막으로 쓰고 있다.

사실 오늘 제목에는 천국과 지옥이 그대로 들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의 모든 말씀들도 여기에 돌아간다. 사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라는 말씀이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라는 권면도 천국의 백성으로 살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당연히 앞부분의 “성령을 받으라!”고 숨을 내쉬시는 것도 믿는 천국 백성의 새로운 창조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은 사람만이 성령이 함께 사시는 사람이고 세상의 변화에 관계없는 평안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람들이다.



Ⅰ. 성령을 받으라(21~23)

로마서8장에서 바울을 통해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말씀하시는 것처럼 신앙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영과 육의 삶의 차이는 성령의 임재와 그렇지 않음에서 나눠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을 닫고 숨어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오셔서 먼저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b) 하시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당한 죽음의 흔적인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오늘 다시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f) 축복하신다.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평강(εἰρήνη, 평화, 번영, 하나가 됨, 고요, 안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인 된 인류에게는 평강이 없다. 그것은 죄가 발각되면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죄를 받은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은혜가 평강이다.

사실 평강하라고 축복한다고 해도 상대가 죄의 상태에 있다면 평강을 누릴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반복해서 축복하시지만 여전히 제자들에게는 평강이 없었음을 이어지는 21장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미래적인 축복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평강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다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b)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에 빠진 인류와 평화를 위하여 화해의 중보자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희생 없이는 화해나 평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삼으셔서 보내시고 이미 그 화해를 위한 제물로 죽게 하시고 그 이루어 놓으신 화목제의 바탕에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한계는 아직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입장에서 이 v21~23의 중심이 바로 v22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처음 사람 아담을 창조하실 때와 같은 모습으로 이해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또 피폐한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실 것의 상징으로 에스겔 선지자에게 골짜기의 무수한 뼈들에게 살을 입히게 하신 다음에 “…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겔37:9) 하심으로서 큰 군대로 회복하심에서 볼 수 있다.

한 개인 아담에게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살게 하신 하나님은 장차 메시아를 보내실 죽어 있는 나라를 살게 하시고, 최종적으로는 사도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새로운 창조를 하심으로서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를 다시 창조하시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으로 새로 창조된 사람들을 가리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혼란하는 성령의 언약은 성경에서 분명히 약속되고 있다. 우리의 인격(知情意)적인 경험보다 성경의 약속이 더욱 중요하고 분명하다. 사도행전2:38은 이 약속을 가장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례에 하나가 되고 부활과 함께 물에서 올라온 거듭난 사람에게 성령은 선물로 주어진다. 다만 성령의 충만과 충만치 못함이 성령을 따라 사느냐 육신을 따라 사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성령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거듭난 새롭게 된 사람 속에 오시고 이것은 이제 하나님을 대신한 사죄의 약속까지 주신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3)

이 같은 언약은 이미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응답으로 말씀하신 바 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이것은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 권한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사죄를 입고 성령의 전으로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언약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다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고 교회 공동체 속에 확인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 속에 오신 성령의 임재하심이 사람의 가치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고 하나님의 쓰심을 확인하게 된다. 성령의 임재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유용한 도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Ⅱ. 믿는 자가 되라(24~29)

언제나 함께 하지 못하고 따로 움직이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간에도 문제였다. “도마[Δίδυμος, Θωμᾶς(아람어)] 쌍둥이” 이 이름처럼 마음이 둘이 어서는 안된다. 언제나 한마음으로 주님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중요함에도 이 디두모라는 도마는 제자들이 주님께서 오셔서 자신의 부활을 확인해 주실 때 함께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24) 함께 있지 못했다면 다른 모든 제자들이 증거하면 받아들이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그렇지도 못한 것을 본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5)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을 위하여 사용되는 본래부터 사악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어떤 제자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심을 본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26)

안식 후 첫날 즉 오늘의 일요일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주님께서는 “여드레를 지나서” 즉, 다음 일요일에 도마와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오신다. 어쩌면 이 나타나심은 도마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여전히 문은 닫혀 있었지만 예수께서 가운데 나타나시고 이때도 하시는 말씀은 한결 같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만약에 주님께서 도마를 위해 오셨다면 마음과 믿음이 하나되지 못하고 나눠져서 혼란하는 도마에게 그 마음을 믿음으로 합하여 평화를 누릴 것을 당부하시는 교훈일 것이다. 사실 우리 주님은 결코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래서 오늘 너도 나도 아직 믿음 안에 머물러 있음을 감사드려야만 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마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어떤 이유에서도 믿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기 때문에 확인하고라도 믿는 자가 되라고 당부하시는 사랑이시다. 인간적인 입장이었다면 ‘의심하는 너가 아니라도 믿을 사람,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할 수 있지만 우리 주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의심의 그늘에 있는 사람은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b)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회를 열어 놓고 계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기회가 닫혀버릴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 “그리하여”라는 말은 ‘그러기 전에 어떤 이유에서 라도 믿음으로 돌아오라’시는 사랑의 초청이시다. 우리가 믿지 못하고 불신에 잡혀 있는 것을 기뻐할 대상은 어두움의 세력뿐이다. 누구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제서야 도마의 불신의 구름은 걷어진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나사로가 죽었으니 함께 가자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b)는 엉뚱함도 있었지만 자신이 확인한 것에 확신을 가지는 모습에서 분명 믿음의 제자가 분명하다.

특히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육신적인 선생님(v16 랍오니-마리아)이 아니라 바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으로 고백 드림으로써 단순이 인간적인 예수가 아니라 이 서신을 쓰고 있는 요한과 같은 믿음을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도마의 고백을 통해서 모든 후대의 믿음의 사람들을 격려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받으시고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라는 책망조의 말씀을 하시는 데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사실을 보고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실적인 믿음을 칭찬하시는 내용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 다시 히브리서의 믿음의 정의를 보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히11:27)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눈에 보이는 바로왕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영의 눈으로 더 의식하면서 자신을 향하여 진노하는 세상의 권력자를 이겨냈다는 이야기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종이라면 사실 보이는 세상의 권력과 위협보다는 하나님을 더 의식하고 두려워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에게 이김을 주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바울 같은 감격의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당부의 말씀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b) 또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9b) 권면과 축복을 감사로 누리는 …



Ⅲ.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0~31)

이 말씀은 앞에서도 그 중요성으로 인해서 상당히 자주 인용했던 내용으로 기억한다. 오늘 이 마지막 부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면서도 왜 자신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수밖에 없는가를 잔잔하면서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쓴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자신을 통한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이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또 다시 비슷한 말씀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주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30) 이 복음서를 강론하면서 서론에서나 일곱 이적들을 다룰 때마다 대부분 언급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존경하며 따르는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이적들이 공관복음에 나타난 기적들을 인정하면서 그 기록보다도 더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럼에도 요한은 단 일곱가지 이적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움직이심을 자신의 글에 옮긴 이유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

그러므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이라는 의미는 ‘이것을 기록할 수밖에 없는 한가지 이유는’ 이라고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글을 쓰든지 반드시 그 글을 쓰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아니면 구태여 그 글을 쓸 필요가 없다. 요한은 자신의 이 장황하지 않게 정선된 내용으로 이 복음서를 쓴 오직 한가지의 이유를 이제 밝히고 있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31f) 어쩌면 한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든 인류에게 한결같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은 적어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던 받아들이지 않던 인생에 있어 성패를 좌우하는 가치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 태어났다가 가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잃지 않도록 마련하신 구원의 과제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정한 하나님 아버지의 의향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이기 때문에 사실 그들의 잘못된 선택이 불쌍한 것이다.

요한의 의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거기에 따른 결과 까지를 말하고 있다.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b) 사람에게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은 이미 주님께서 수없이 말씀하신 바 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막8:36; 눅9:25)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지 못하고 허탕치는 인생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이 귀중한 하나님의 뜻이나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면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을 이유로 바로 “가라!”하시는 주님의 명령이시다.

우리는 선교나 전도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선택된 사람만이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더러 보는데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의 가르침이 아주 자연스럽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앞에서 봤던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어 생명을 가지는 것이 먼저이고 죽은 삶이 아니라 산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증거하는 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라는 가르침이다.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b) 예수께서 앞에서도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선언하셨듯이 생명을 얻는 다른 이름이나 방법을 하나님께서 주신일이 없는 까닭에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베드로를 통하여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독선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우리의 삶에 귀중한 것들은 다른 것들로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은 영생과 생명에 관한한 다른 방법이 인류역사 수 천년 속에서도 나타나지 못한 데서 조금만 하나님 편으로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충분히 이해가능한 약속이다.

이제 우리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 대속제물로 죽으시고 장사 되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셨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는 여전히 모든 산 사람들에게 기회는 열려 있다는 데서 감사하고 이 귀중한 기회를 놓지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복음을 이루신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멸망으로 가지 않는 귀한 은혜와 사랑을 넘치도록 누리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바라심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