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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갈 3:15~18 2021-09-19
하나님이 주신 약속으로 말미암아,  
율법 행위의 무용론과 믿음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 속에서 비록 정죄의 법으로 더하여 진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율법 이전에 주어진 언약을 율법이 폐할 수 없다는 데서 율법행위와 믿음의 비교 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귀중성을 다시한번 확인시키신다.

믿음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낱말이 바로 약속 또는 언약이다. 언약이나 약속은 지금 당장에 있는 일이 아니라 미래적이고 장래에 이루어질 일이므로 그것을 신뢰하고 기다릴 수 있는 도구가 바로 믿음이다. 다만 이것은 반드시 서로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이 언약이나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성경자체가 언약(고후3:14구약을 읽을 때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옛, 새 언약O, NT).

이뿐만 아니라 사람의 모든 관계(부부 <사랑의 언약이 약해지면 가장 취약한 관계로 이 마지막 범죄의 시대에 부부의 언약이 어겨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자, 국가, 고용)는 약속으로 이루어지고 그 약속은 계속되어질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갱신되기도 하며 약속이 시간을 채우고 공간을 채우며 일생동안 계속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이 언약의 관계이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것을 어기신 적이 없이 오히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면 그 약속에 스스로 매이시는 분이라고 말 할 정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언약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모두 이루어지리라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는 말씀하셨다.

문제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중 하나가 자신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 그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하여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전5:4~5) 라고 지적하셨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주신 약속을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도 주신 바 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사람들은 이렇게 수시로 서로 약속을 한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6하원칙 역시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 문제는 이 문화가 발달하고 교통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빠르게 왕래하는데도 이 역사가 마지막으로 가면서 작은 약속조차 자꾸만 어겨지고 있고 이것이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이 가정들의 파괴이다.

심방 같은 예를 들면 약속을 하면 갈 수 있는 시간보다 일찍 나서고 그럴지라도 교통의 흐름의 상황에 따라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고 그럴 때는 시간전에 반드시 전화를 해서라도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수의 사람들은 ‘그까짓 시간 몇 분 늦었는데’ 라고 오히려 큰소리 치기도 하는데 역시 언약에 사는 사람으로서 옳지 못한 행동이다.



Ⅰ. 하나님의 언약은 폐할 수 없다(15, 17).

사람들과 약속도 어기면 안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은 더욱 폐할 수 없다는 당연하고 안타까운 사실을 바울은 거론하고 있다. 또 사람들은 성경에 쓰여진 언약만을 생각하는데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가 당연히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 두 절 속에는 먼저 사람의 예를 들어 언약을 설명하고 사람 간의 약속도 어겨서는 안된다면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이 절대로 어겨질 수 없다는 사람(15)과 하나님(17)의 언약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같이 묶어서 생각하고자 한다.

언약이 어겨진 사실에 대한 탄식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시는 것을 보는데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라고 탄식하시는 데 짐승과 주인의 관계도 기록된 문서는 없지만 언약의 관계라는 것을 짐승들조차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소나 나귀는 반드시 자신의 주인을 알고 자신이 들어가야할 구유를 안다는 것으로 만약 짐승이 자신의 주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남의 집에 들어갔다면, 그 주인 아닌 사람이 악하지 않은 사람인 이상 그 짐승을 주인의 집으로 되돌려줄 것이다.

여기에 언약이나 약속으로 사용되고 있는 낱말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언약[διαθήκη = διά+τίθημι (선에 대한 신적인 ‘확신’을)통고, 소식, 유산]”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눅1:72)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행3:25)

“약속[ἐπαγγελία = ἐπί+ἀγγέλλω 특별한 계약, 예고, 허락]”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엡6:2)

“맹세[ὅρκος, 한계, 제한, 마5:33(否定), 14:7, 9(헤롯), 26:72(베드로); 막6:26(헤롯); 눅1:73(사가랴); 행2:30(하나님); 히6:16, 17(하나님); 약5:12(否定)]”를 참고하면 하나님께는 가능하지만 사람으로서는 지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의적 선언이면서 이방 왕이었던 헤롯의 얘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에게는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 지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15)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을 당시의 사람 간의 귀중한 언약의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창15:9~10f) 라고 기록되고 있고 그런 다음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17) 하였는데 이것은 아브라함 당시의 사람들 간의 언약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게 하신 것이다. 짐승들을 절반으로 쪼개 놓고 그 사이에 서서 만약에 서로 간의 언약을 어길 시에는 그 쪼개 놓은 짐승처럼 몸을 쪼갤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모습으로 이것을 두고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언약의 사람들이라면 사람 간의 작은 약속조차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약속이 지켜질 때 신뢰 즉, 믿음은 쌓여가고 더욱 큰 미래의 약속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7)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상속자 즉, 자녀를 삼으실 것을 이미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정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시간의 적용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사람의 범죄를 창세전부터 이미 아셨던 하나님은 인류를 구하실 언약을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이미 세우시고 그 도구로 시대를 따라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 일을 이루셨는데 수 천년의 기간이 문제되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께 430년은 사실 짧은 기간일 뿐이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폐기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그 가장 구체적인 인물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고 아직 그들이 작은 가족이었을 때 세우셨던 언약이 국가가 되었다고 바뀔 수는 없으셨을 것이라는 바울 사도의 확신이다. 사실 언약은 1:1일의 관계에서 보다 많은 사람 속에서 더 중요하다.

이런 사실들을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7)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셨다면 그 언약을 하나님께서 어기는 예는 영적인 세계의 역사에서나 이 세상의 역사에는 아직 없다. 그러나 언제나 어기고 손해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아주 사소한 예를 든다고 하면 교통법규등 같은 것이다. 아마 소수의 사람들만 있다면 오히려 번거롭게 이런 신호체제는 필요하지 않아도 되고 또, 모두가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에 있다면 교통법규는 크게 필요치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에는 교통법규라는 약속도 많이 어겨져서 사상자들이 더러 생기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믿음에 들어오면서부터 하나님과 약속을 채결하였고 그것은 그냥 허튼 약속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할 약속들이었다. 사실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것도 그 약속의 한 부분이다. 성경에는 어느 시간에 예배를 드리라는 시간 규정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대부분 AM11:00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동서양에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과 만남의 약속조차 등한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어기면서도 크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일보다는 우리의 모임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자고 약속한 시간이다.

특히 직분을 받을 때는 회중 앞에서 “공식적인 집회에 참여한다.”는 다짐을 받기도 하였다. 이것은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인데 시간이 가면서 이 약속은 점점 무디어져서 심지어는 꼭 중요한 일이 없어도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장 쉽게 어기는 하나님과의 약속임을 알고 돌이켜야 할 것이다.

앞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한바 있지만 적어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2)고 탄식하시리만큼 그래도 하나님과의 만남의 약속은 지켰음을 본다. 그런 입장에서 완성된 복음 속에 있는 우리들은 그들보다도 못한 것 같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약속보다 세상의 흐름에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어느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기느냐, 그리고 어느 쪽에 더 삶이 움직이느냐에 따라 영적인 사람일 수도 있고 세속적인 사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과의 약속도 폐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약속에는 얼마나 중요한가를 판단하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과의 약속의 자리에는 나는 출석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와 계심을 의식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나 또 우리 마음 속에 계시는 것을 핑계로 주님과의 약속인 모임에 빠지는 이유로 삼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옳지 않은 것이다.

약속은 반드시 그것을 이행할 행동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약속을 위한 행위는 의무에 의한 행위인 율법과는 다르다. 믿음이 행위를 필요로 하는 명사(名詞)가 아닌 동사(動詞)인 것처럼 약속은 반드시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행동을 유발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언약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망적인 행동이 된다.

사람은 행동하는 동물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모양의 행동일지라도 그 행동의 원인은 다르다. 성경에는 율법에 매인 죄를 짓지 않으려는 부정적인 행동과, 영생의 기업이나 주시는 사랑을 누리기 위한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은 확실히 다르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믿음과 더불어 확인하는 바울의 의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약속의 자손은 그리스도(16)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당연히 그의 자손들에게도 계승되는 언약이겠지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b) 하신 것은 그의 육신의 혈통을 통한 것이 아님이 확실한데 왜냐하면 그의 혈통을 통한 자손들이라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란 이삭의 계보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브라함당시에도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었지만 이것은 너무 인간적인 방법에 의해서 얻어진 아들이었다. 아브라함보다는 사라에 의해서 이집트 여인 하갈에 의해서 얻게 된 사람의 바램과 기대의 산물일 뿐으로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약속 앞에 율법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b)는 말씀으로 다시 찾아오셨을 때 약간은 의심하는 자세로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2~3) 라고 아브람은 답변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4b)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5) 말씀하신다.

그리고 지난 번에 나누었던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6)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7) 확인하신다.

그 다음에는 이름을 바꿔 주신 후에 사라의 이름도 바꿔 주시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17:16)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백세 된 자신이나 90세인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있겠냐고 웃으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8b) 라고 신통치 않게 여긴다.

여기에서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21) 하신 것이다. 다시 18장에서 세천사를 보내셔서 주신 언약이 “…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 확인하셨다.

그러나 이 구체적인 언약에도 장막 뒤에서 그것을 들은 사라는 마음 속으로 비웃으며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2) 라고 부정하고 만다.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3)고 책망하시고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14f) 하신 후 약속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확인하신다.

그러나 사라는 역시 웃지 않았다고 부인하고 하나님은 웃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이유에서 주어진 아들이 ‘웃다’라는 의미의 이삭이었는데, 나중 이삭을 낳은 후에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6)고 고백한다.

이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도 이삭과 같은 의미를 가짐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신하는 비웃음을 웃는 사람과 감격으로 기쁨의 웃음을 웃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씀이 고린도전서1:18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후 여러 번 이 언약을 확인하시는 동일한 약속을 말씀하신 것에서 “약속들”이라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으로 바꿔 주시고 12의 자식으로 이 약속이 확대되는 야곱보다도 보다 근본적인 약속을 확인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 우리 또한 동일하게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16b)”는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같은 약속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다. 할렐루야!



Ⅲ.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신 유업(18)

여기서 우리 말의 발음이 중요하고 다르다. 즉, [유업]과 [율법]이 그것인데 사실 둘은 전혀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살 수 있는 것과 죽을 수밖에 없는 정도의 차이를 가지는 낱말이다.

사실 율법은 한가지 약속밖에 없다. 이 율법을 지키면 “…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롬10:5) 하였고 이미 앞의 v12에서도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내용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모든 죄의 사람들에게 이 약속은 너무나 막연한 것이 되고 말았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18f) 이 말씀이 주의하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유업[κληρονομία, 상속(마21:38; 히11:7), 유산, 소유]”은 당연히 나중에 더하여 진 율법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하신 것이라는 확인이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18b)는 말씀이다.

그런 이유에서 율법에는 약속이 없고 다만 지킬 것을 요구할 뿐이다. 아브람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b~2)는 미래적인 약속은 단순히 가나안 땅 즉, 흙에 속한 약속이기 보다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에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써의 생명의 약속이다.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18b) 이 말씀자체가 은혜를 강조한다. 어떤 노력이나 공로, 수고의 대가가 아니라 거저 주셨기 때문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 즉, 은혜는 사람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이며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다.

영원의 생명의 유업 역시 우리에게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물이나 산소처럼 영적인 요소에서 귀중한 것이지만 범죄한 사람 스스로 확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값을 치르시고 자신을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여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은 이미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언약 때문이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실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열매 없는 사람’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수고에 결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열매는 언제나 수고의 결과이다. 신앙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키기만 하면 이미 열매가 보장되는 언약이다.

세상의 약속도 지키지 않아 신뢰를 잃어버린다면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과 영생이라는 귀한 열매는 어떤 인간의 가치나 노력이나 수고로도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선물로 약속하셨다.

이것은 이미 율법이 있기 전에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율법이 감히 그것을 무효화할 수 없었고 그 열매로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러 번 방황하였지만 그에 후손은 이삭이었고 이삭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주셔서 오늘날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되었다. 이 언약으로 주신 영원한 기업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온 인류에게 주신 약속이며 그 언약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오늘 나를 위해서 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