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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9:1~10 2022-06-26
이것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 9장에서는 OT의 제사와 제물과 NT에서의 제사와 제물을 좀더 가까이 접근하여 살피며 비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 열 절에서는 주로 OT의 제사와 제물을 설명하면서 그 완전치 못함을 지적한다.

다음 시간부터는 완성된 복음 속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제사와 제물을 말하면서 NT의 제물은 OT의 그것과 달리 완전하며 그 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피인 것을 증거하고 다음장에 가서 더 완전하게 보겠지만 이 제사는 한번으로 영원히 효력이 있음을 증거한다.

이 내용의 절반에서는 OT 성막의 도구들을 소개하고 그 도구로 이루어진 제사를 설명한 다음, 그것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통한 제사의 그림자였음을 비유적으로 풀어 증거하고 있다.

여태껏 조금은 넓은 범위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이 둘을 비교했다면 여기서부터는 좀더 접근하여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역시 강조되는 것은 이 땅의 것은 임시적이고 사라질 보이는 것이라면 그 원형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임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원형을 사람들에게 보이시려고 인간적으로는 그 많은 세월동안 그림자적이고 모형적인 것들을 보게 하고 훈련하여 온전한 것에 접근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이었지만 한번 죄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전혀 깨달음을 갖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이 분명한 한계는 영원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순간적이고 소멸되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사람과의 간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하찮은 인간군상들을 자신의 영원 속에 초대하시는 데 많은 세월을 쓰셨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감사하게 오늘 우리가 이 영원의 본질에 나아가야 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지금 이 은혜 속에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당연히 찬양함이 마땅하다.

여러분은 이런 감격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있는가…! 오늘도 결론은 각자가 정리하라.



Ⅰ. 첫 장막과 섬기는 도구들(1~5)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아브라함을 통하여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22:18b)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4b) 두번씩이나 확인하셨다.

그럼에도 이집트를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드디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여전히 천하 만민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생각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십자가로 구원을 완성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복음의 전파를 당부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신 언약이 이루어져 예루살렘과 유대에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졌지만 이 명령을 직접 들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조차도 나아가지 못했다.

드디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박해가 예루살렘에 일어나고 도망치듯이 사마리아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됨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에 무딘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물론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이야기는 주로 광야속에서 있었던 제사와 섬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특히 앞에서 주로 비교해 왔던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이야기는 주로 레위가문의 제사장들과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비교가 많았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제(前提)로 좀더 발전된 이해로 나아간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1) 모세의 율법과 더불어 주어진 예법은 어쩌면 더 철저했고 그것이 어겨질 때마다 형벌은 즉각적이었다.

옛 언약 속에서도 섬기는 예법은 분명히 있었고 그럼에도 한계는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는 것이다. 분명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식이라면 하늘에 속한 성소가 있어야 할 것임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어디에나 신이라 이름 붙인 위하는 것들을 섬기는 예법이 있다.

심지어 조상숭배를 위해서도 섬기는 예법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섬김이 세상에 속한 성소 즉, 땅에서 이루어진 불완전한 것임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예식들과 모임은 교회마다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하늘에 속한 것인지 세상에 속한 것인지는 바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나머지 v2~5은 앞에서 말한 세상에 속한 성소의 구조와 도구들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2) 광야에서의 장막은 주로 두곳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하면서 성소라고 일컫는 곳에 노여 진 도구들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이 성소라 일컫는 첫번째 장막안의 모양들은 먼저는 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주시고 그대로 만들게 하였다. 먼저 등잔대는 출애굽기25:31~40에 보여주시는 내용이고 다시 37:17~24에는 브사렐을 통하여 이것을 만드는 내용이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성소의 왼편에 놓여 있는데 어두운 성소를 비추게 되어 있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일곱 영”(계1:4, 3 ;1, 4:5, 5:6)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성소의 오른 쪽에는 상과 진설병이 있는데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수대로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다시 진설하게 되어 있다. 이 떡은 물려낸 후에 제사장들만이 먹게 되어 있지만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치다가 굶주려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이 떡을 얻어먹은 유명한 일화로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다(마12:3; 막2:25; 눅6:3)

이것은 아무래도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에 틀림이 없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으로 군중들을 먹인 후에 자신이 생명의 떡이신 사실을 증거하셨고(요6:35, 48~51) 공교롭게도 이 기적후에 남은 조각을 열 두 광주리에 거둔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진열상에서 매 안식일마다 떡을 물러내고 새 떡을 진설 하는 것은 우리가 매주님의 날마다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에 상징이라고 이해하여도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밖에도 성소의 다른 도구들이 있기도 하지만 특별히 이것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3) 성소의 바로 안 지성소를 보여주기 위한 언급이다. 그러나 성소에 휘장은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소의 입구에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이 휘장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십자가에 운명하시면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공개되고 말았다.

이것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특별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믿고 하늘로부터 거듭나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친히 말씀하신 대로(요3:3)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다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 진 것임을 확인하는 사건이다.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마27:51; 막15:38; 눅23:45) 아래에서부터 찢어졌다면 사람이 찢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위로부터 아래까지 라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친히 찢으신 것이 분명하고 이렇게 성소안을 만천하(滿天下)에 공개하신 것 역시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지성소[קֹדֶשׁ (kodesh) 분리됨, 거룩함, 신성함, ἅγιον, 성소, 지성소(출26:31~37)]”란 가장 신성한 곳으로 일반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철저히 구별된 [거룩한 것 중에 거룩한 것] 이스라엘에서는 그야말로 성별(聖別)된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곳으로 여기고 두려워하는 곳이었다.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4) 지성소의 내용을 설명하는 이 부분은 다소 OT성경에 나타난 것과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앞에서 지성소라 하였지만 지성소에는 법궤와 그 안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써 주신 언약의 돌판 둘만이 있는 것으로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가지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 안에는 사실 언약의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왕상8:9; 대하5:10)

여기 거론되는 “금 향로,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사실 지성소에 있는 기물들이기 보다는 앞에서 거론하다 만 등잔대나 진설병의 떡상과 함께 지성소 앞의 성소에 있는 성물들이다.

만나를 간수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을 봐도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출16:33) 하셨다. 또 거론된 아론의 싹난 지팡이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민17:10)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이 복음의 완성 후에 과거를 돌아보며 완벽한 제사와 속죄를 비교하는 데 있어서 이런 완성되어 없어진 것들의 사실을 확인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하는 중요성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정도로 진행하고자 한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5) “속죄소”는 כַּפֹּרֶת(kapporeth) ἱλαστήριον, 속죄하는 것, 화해시키는 것, 죄를 가리우는 곳, 화목의 장소, 자비의 보좌 등 성경들에서 여러가지로 번역이 되고 있다.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의 윗부분을 가리고 있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양쪽에서 서로 마주하여 날개를 편 한 쌍의 천사(그룹)의 형상이 설치되어 있다(출25:17~20). 1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자기의 죄를 위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속죄를 하는 장소로 그 두 그룹 사이를 하나님의 보좌로 여기며, 거기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출25:22, 30:6; 민7:89).

이 말을 하면서도 마지막으로는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고 설명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 히브리서를 기록하는 목적도 아니고 죄인의 참 속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그림자적으로 행했던 것들을 예로 든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 복잡하고 요란스러운 구조와 그 속에서 행해지는 두려운 제사를 통해서 사죄를 받았던 과거의 성막의 제사를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더 감사하고 충성해야 할 것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



Ⅱ. 첫 장막의 제사(6~7)

앞에서 본 대로 성소가 준비되고 제사장들이 의식을 행하는 내용의 시작이다. 그럼에도 여기서도 자격과 가능한 일이 나눠지고 있다. 물론 성소에는 일반 백성들은 들어갈 수 없고 제사장들 만이 각자에게 가능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새 언약 속의 일꾼들과의 차이로 보여 진다.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6) 첫 장막은 성소를 말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주로 제사장들이 매일 하는 일과 한 주간의 할 일이 정해져 있다.

특별히 여러가지 제사를 드리는 일 외에도 매일 할 일은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출30:7~8) 아침 저녁으로 향을 사르고 저녁때는 등을 켜는 일로 이 일은 계속적으로 행해야 할 과제였다.

오늘 날과 같이 한 주간마다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안식일마다 열두개의 진설병을 새 것으로 바꾸어 진열하는 의식을 반복하는 것으로 이 일은 레위의 후손인 제사장들이 해야 할 과제였다.

일년 일차에 제사장이 아닌 대제사장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을 연이어 말하고 있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7)

첫 장막을 성소라고 했다면 둘째 장막은 법궤가 모셔져 있는 지성소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히 대제사장이 홀로 속죄를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레위기16:6~22에 나타나 대로 보면 “일 년에 한 번”이란 표현이 단 한 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7b)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도 염소나 양 또는 수송아지를 잡아 피를 제단에 뿌릴 뿐만 아니라 아사셀 염소를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지워 광야로 보내기도 하며 향을 살라 그 연기로 지성소의 속죄소를 가리게 한 후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레16:13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 할 것이며).

여기에서 독특한 것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태워 바치는 번제나 기타의 제사 보다는 주로 피를 뿌리는 것으로 표현하여 죄를 속죄하는 의식에는 피 뿌림의 의식이 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OT의 율법에서도 보는 것이다. 이것을 주도하는 제사장은 아론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만이 행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대제사장이 홀로 행하는 것으로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적으로 보게 된다.

이 일을 행함에 있어서 완전한 계급의 차이와 행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본다. 성소와 지성소, 백성들과 제사장 또 제사장과 대제사장 결국 이러한 구별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허물어지고 우리 모두는 같은 위치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같은 제사장직을 감당하게 되었다.



Ⅲ. 완전한 제사의 비유적 모형(8~10)

오늘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앞에서 봐왔던 것들을 성령을 통해서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첫 장막과 둘째 장막, 그리고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이 행한 것들을 오늘의 복음 속에서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8)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참된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모형으로 땅에 성소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임재 해 계신 지성소까지는 성소라는 또 다른 공간이 있고 오직 지성소를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대제사장에게만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장차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참 성소에 들어가실 수 있는 분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결국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 즉, 땅에 성소가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최종적으로는 땅에 성소가 치워질 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참된 길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으로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 예언이 이루어 짐을 본다(마27:51; 막15:38; 눅23:45).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9) 과거의 모든 제사의식이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한 비교라는 의미이다.

“비유[παραβολή, 곁에 둠, 비교]”가 옆에 나란히 두고 비교해 본다는 것으로 완전과 불완전을 판가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비유가 “현재까지”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에서부터 이 히브리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쓰고 있을 때까지 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즉 율법에 속한 제사를 통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죄나 용서를 모두가 같은 범주에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양심[συνείδησις, (함께) 보다, 이해하다 = σύν, 함께 + εἴδω, 보다, 알다, 경험하다]”이 의미하는 바가 그렇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서는 같은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모두 확실한 사죄와 천국을 확신하는 것과 다르다는 의미이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10) 율법에서는 제사뿐만 아니라 먹을 수 있는 동물과 곤충까지 모든 음식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구분되어 있다(레11:1~23).

또 백성이 회막에 들어갈 때도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레10:9~10), 씻는 예식까지도 엄격하였다(막7:2~5; 레11:24~40, 16:24~26). 그러나 그것은 다만 육체에 관한 예범으로 내면의 정신이나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었다.

예수께서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이스라엘의 의식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막7:19) 하신 말씀에서도 의식상으로서의 계율들이 영혼에 영향이 없음을 가르치셨다.

여기 마지막에 쓰여지는 단어가 많은 교회들에서 지금까지도 귀하게 사용되어지고 있는 표현이다.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한 “개혁[διόρθωσις, (비정상이 된 것을 본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에서) 개량, 개선, 개혁, 새 질서]”이란 낱말이다(reform → restore). 의미들을 볼 때 [회복]이란 말이 더 적절한 뜻이다.

다만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던 사람들을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할 때까지 성막의 예식을 허용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역시 이것을 가능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때까지라고 이해하면 옳을 것이다.

결국 율법 속에서의 모든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사죄의 은혜를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사죄와 구원을 누리는 우리는 더욱 큰 확신과 감사로 이 땅에 죄와 상관없이 자신을 바라고 기다리는 자들을 위하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감격하며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