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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9:15~22 2022-07-10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이루신 구속의 역사의 확인이라면 여기서는 새언약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시50:5)한 것처럼 제사로 회복되는 관계라는 데서 제사와 언약은 분리할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진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과 그의 백성들과 관계의 회복을 대부분 짐승의 피를 통해서 다시 회복하게 하신 것이 OT의 계명이고 언약이며 약속이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분명히 지켜 지기만 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선택된 이스라엘 조차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살게 하는 언약을 어기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꾀를 부리기도 했다.

특히 오늘 상고하는 첫 14절은 OT의 믿음의 백성들의 구원에 가장 확실한 언약의 확인이라는 데 무개가 있다.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두가지 정도로 다루겠지만 율법 속에 하나님을 순종한 사람들이 과연 짐승의 피로 구원받았을까에 대한 해답이 그 수없이 행해지는 짐승의 피의 제사를 드리고 있던 OT에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NT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피에 대한 증거가 무수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주님의 희생으로 그 피의 은혜로 구원받은 복음 후의 사람들에 대한 언약의 확인이지만 이 히브리서야 말로 자신의 동족들에게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확신을 주고 있는 호소이다.



Ⅰ. 모든 언약의 중보자(15)

이 말씀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가 단순히 육체만이 아닌 양심까지 정결하게 할 수 있었음에 사실을 받아서 그 피의 제사가 새언약의 시작이요 바탕인 것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1f) 시작에 “이로 말미암아”는 이미 8:6에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했었던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을 생각 한 바처럼 그것이 모세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러한 약속들이 이루어진 것을 증거한다.

하지만 이 약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다른 맹세할 대상이 없어 자신의 이름과 영광를 두고 언약하신 것이라고 이미 6:13에서도 살핀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이 이보다 더 분명한 데도 드물다.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1m)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역사의 중심에 오셔서 과거 족장시대는 물론 율법시대와 복음시대를 통틀어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음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물론 OT의 율법을 범한 자들이 죄 용서를 받게 하려고 죽으셨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이 말씀의 확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못지 않은 중요한 의미는 OT의 모든 믿음의 백성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죄의 은혜는 당시 짐승의 피로 죄를 용서받던 불완전한 사죄가 아니라 아담 이후의 모든 하나님을 경외하던 OT의 모든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라는 약속이다.

이런 이유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4) 하시고 다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는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하신 바 있다. 이런 내용들이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라는 말씀으로 확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OT에서 의인으로 인정되던 에녹은 말할 것 없고 아브라함과 모세는 물론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4:14, 16, 18) 하였던 모두도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요즘 표현을 사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효력은 아담 이후로까지 소급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는 이론이다. 물론 이들 모두도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초청에 순종한 자들임을 다시 증거한다.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5b)

그런 이유에서 이어지는 약속은 보이는 세계속에 복을 누렸던 OT의 순간적이고 제한적인 약속의 땅 가나안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과거의 한계와 분명히 비교하고 있다.

이런 전체적인 구원의 역사속에서 볼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의 머리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의 효력을 가지고 있고 OT 율법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면 십자가 이후의 복음 속에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할렐루야!



Ⅱ. 유언의 효력(16~17)

이 법령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현행법과도 다르지 않은 법 조문이다. 부모들은 반드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변호사나 기타 자신의 가족들을 불러 사후에 자신의 제산 처리를 유언하기는 하지만 그 유언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유언한 일들을 시행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16) 했는데 헬라어에서 같은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것은 앞에서 주로 “언약(διαθήκη)”으로 번역되었던 같은 낱말이 여기서는 그 문장의 구조에 따라 역시 의미는 같지만 좀더 믿음이 필요한 “유언(διαθήκη오늘의 난외 주)”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약(διαθήκη, 언약, 정돈, 명령, 제도)”의 의미를 살펴본 바 있지만 διά 사이에 + τίθημι 둔다는 의미로 관계속에 이루어지는 어떤 것과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나 조항들을 서로 맺고 지켜가는 것이다.

앞에서 계속 인용되고 있는(8:8~) OT에서 “언약”(렘31:31~33) (בְּרִית, briyth, 언약, 계약, 조약, 협정, 법령, 서약, 동맹) ‘בָּרָה(barah, 삼하3:35), 먹다, בָּרָא(bara’), 창조하다, 구별하다, 먹다, 새로운 것을 개시하다’는 등등의 의미들을 가짐으로써 이 유언이나 언약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작게는 한 나라와 백성 간의 관계이면서 한 집안이나 가문의 관계를 지속하는 약속이기 때문에 그러한 관계를 연결하는 약속이나 언약이 어겨지면 관계도 끊어지고 마는 것인데 현실에 우리가 더러 보는 바로는 대개의 경우 돈을 많이 가진 집안들의 자녀들이 유언이 지켜지지 않아 관계들이 깨어짐을 보는 데서 볼 수 있다.

단순히 육신의 한 평생을 살고 가는 언약의 관계에서도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다면 온전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약속은 말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언약이요 유언과 같이 반드시 지켜야만 할 계약이다.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17) 무엇보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하신 언약들이 유효하게 되었다는 확인이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라 하였지만 이 새언약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새언약이 드디어 효력을 가지게 된다는 원리는 OT에서도 비록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메시야가 이 땅에 와서 죽어야 한다는 예언들(사53장)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 v16~17은 가장 우리 삶에 일반적인 원리들을 언약에 도입함으로써 이해를 돕고자 하는 이 히브리서 기자의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원리야 말로 히브리인들에게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통치는 절대적인 권세와 능력과 평화로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야 왕국을 이루고 온 세상을 지배하고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것이 최종적인 메시야의 통치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야가 희생당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저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고 예언하실 때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막8:32) 라고 직접적으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진리, 보편적인 진리는 믿음의 이치에서도 다르지 않다. 모든 좋은 것들 대부분은 죽음을 거침으로 얻어진다. 단순하게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약속도 그런 사람에게는 가치가 없게 된다.



Ⅲ. 피로서 세워지는 언약(18~21)

여기에서는 잠시 유언으로 비유되었던 약속이 다시 언약으로 되돌아 간다. 그 주제는 다시 언약과 피로 되돌아 가는 내용이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언약은 반드시 피와 관련되는 것으로 그것은 앞의 첫 언약이 짐승의 피와 관련되어 있음을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13)임을 전제로 한다. 이를 분명히 하는 표현이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18) 라고 한 것이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문화와 시대에도 큰 약속이 되는 행사는 반드시 짐승을 잡아 고기로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즐거워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앞에서 봤던 대로 언약이 의미하는 바는 함께 먹는 것이며 새로운 창조를 선포하는 상징일 수 있다.

돼지를 잡아 잔치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주도에서는 혼례식때 양이나 소가 아닌 돼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하게 되는데 최소 5~10마리까지 잡아 결혼을 기뻐하고 가문간의 언약을 채결하는 행사가 일반적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사람과 언약을 맺는데 있어서 육체를 가지지 않으신 하나님께는 먹는 것이 별 가치가 없으셨겠지만 이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알게 하시려고 화목제의 기름을 태우고 고기를 함께 나눠 먹게 하셨다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19)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에서 시작하여 대부분의 율법을 포괄적으로 백성에게 전한 후에 출애굽기 24장의 시작부분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내용을 자유스럽게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이 그때의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다.

당시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행한 것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4~6)라고 되어 있다.

본문에 인용하는 대로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19) 하였지만 인용된 본문에 나타난 것은 다만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한 다음에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라는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성경에서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라는 내용과 비슷한 예는 레위기14장에 나병환자의 정결예식 때나 집이 나병에 걸렸다가 깨끗해진 경우에 뿌려지는 것으로 사용되는 예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붉은 양털이 피 뿌림의 도구로 사용된 예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레14:6~7) 여기에서 보는 대로는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한 것 때문에 “홍색 실”을 “붉은 양털”로 의역한 것 같다.

한가지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오늘 본문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라고 한 것인데 쉽게 지나치는 것은 “피”는 아니지만 “물”이 그것이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5:7~8) 한 것이다.

진리의 사도인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 최종적으로 물의 세례를 순종한 자에게 오순절 날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증거하였던 성령을 약속하고 있는(행2:38) 것도 새 언약 속에서 중요한 구조임을 볼 수 있다.

또 이 소를 잡은 피를 인용한 오늘 본문에는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19b) 하였지만 “시내산에서는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한 다음에 오늘 v20의 내용과 같이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말하고 있는 내용은 같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8)

오히려 이런 비교가 확신이 아니라 혼란을 줄 수도 있지만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약의 피”로 이제 새 언약 속에서는 송아지나 양과 염소의 피가 아닌 바로 새언약을 가능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꼭 같이 증거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5)

오늘 우리는 더욱 확실한 새 언약의 주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언약을 받아 기념하며 나누며 누리고 있는 사실에 더 큰 확신과 감사로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할 것이다. 할렐루야!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21) 이 내용 역시 OT의 그대로의 인용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뿌렸느니라”한다면 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인용하는 것처럼 피를 “피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아론을 비롯한 제사장들의 머리에 바르는 관유를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에 바르는 일은 문제될 것이 없다.

“모세가 관유를 가져다가 성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제단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레8:10~11; 출40:9) 라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쨌거나 강조되는 것은 계속 생명과 같은 “피”와 관련된 언약이 확인되고 있다.

이제 결론적인 부분에 이르게 되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22) 이 말씀의 앞부분은 앞 내용의 확인이라면 하반절은 독립구로 결론적인 말씀이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22f) 이 말씀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없다. 비록 다른 도구나 요소들이 사용된다고 해도 죄사함의 도구는 피밖에 없다. 앞에서 이미 본 대로 ‘백향목, 홍색 실, 우슬초, 물’이 사용된다고 해도 그것은 보조적인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22b) 땅이 범죄로 부폐하여 홍수로 멸하시고 노아의 가족이 살아남은 후 땅에 식물이 없게 되자 모든 동물들을 채소와 같이 식물로 허락하신다. 그러시면서도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창9:4) 경계하신다.

그런 다음 이유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선언하신다.

그럼으로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절대적인 원칙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피를 흘려 주셨고 그것은 곧 그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신 것이라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만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은 곧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 내실 때도 문의 문 인방과 양쪽 문설주에 피가 발린 집에서는 죽음의 천사가 넘어갔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집마다 맛아들과 짐승의 첫 새끼들은 집집마다 다 죽임을 당했다.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도 보이는 문 인방과 문설주가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의 인방과 문설주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자들은 죄악의 땅이 멸망할 때 건져내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끄실 것이다.

마지막 역사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자들 만이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