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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0:1~10 2022-07-24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지금까지 나눠왔던 히브리서의 내용은 여러 번 반복하는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OT 율법 시대의 제사에 반하는 것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 서나 제물로 이해하는 것들이 저들에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의도적으로 강조된 것일 수도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순종하는 것만이 효력 있는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이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내용을 나눠 생각하면서 4:14~10:18이 이 히브리서의 본론으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역사라고 말한 바 있고 8:1~를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사라고 말한 것처럼 이제 오늘 v1~10과 다음 주에 나누게 될 v11~18이 이 전체 본론의 요약이면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도 한번의 확실한 그리스도의 희생이 반복되고 있지만 앞의 9장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의 완전성을 강조했다면 이 결론적인 부분에서는 영원하심에 더 무게를 두고 있고 결국 완전한 것만이 영원하다는 데서 역시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릴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 내용에서 반복되는 두가지 내용을 먼저 확인해 보면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5, 8)라는 하나님의 의향과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의적 선언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7, 9) 라는 고백이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부분에서 인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소와 양의 피와 기름을 태워 바치는 것을 원하셨는가?’라는 의문을 말한 바 있다. ‘OT 율법 속에서의 피와 태워 바치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다면 왜, 지금은 그것을 요구하지 않으시는가?’라고 질문하였다.

결국 수많은 짐승의 피를 뿌리게 하고 내장의 기름과 간의 꺼풀과 콩팥을 태워 바치게 하신 것은 그만큼 죄의 심각성을 알게 하실 의향 이셨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본 바 있다. 결국 그 수많은 짐승들의 피와 기름이 사람의 죄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 의향도 계시(啓示)하셨음을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듣고 언약을 순종하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뜻이고 이런 이유에서 좋은 짐승들을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끌어왔다고 하는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에게 사무엘을 통해서 주신 교훈이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이셨음을 이해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5, 8)라는 고백에서 이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의향을 어쩌면 이스라엘은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진노케 해 드렸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향까지 알게 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섬겨야 하겠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Ⅰ. 참 것의 그림자로서 구약의 제사(1~4)

이 히브리서를 기록하고 있는 저자는 해마다 반복되어야 하는 율법 속에서의 제사는 온전치 못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의 그림자에 불과함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제사의 완전성을 다시 입증하기 위하여 복음으로 완성된 제사의 그림자가 OT제사이며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1f) 먼저는 그림자와 참형상이 비교되면서 그림자에 대해 부정이 되고 있다. 분명히 그림자는 실체를 비출 때 나타나지만 실체가 없이는 그림자는 생겨날 수 없고 그럼에도 그림자는 아무리 선명해도 실체일 수 없다. 결국 율법속의 그 수많은 제사는 하늘에서 완전히 드려질 그리스도의 희생의 그림자였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1b) 완전한 것은 여러 개가 필요 없다. 단 하나면 족하다. 마찬가지로 짐승의 생명으로 사람을 온전케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짐승들의 피를 제물로 바쳤어도 한 사람도 온전케 할 수 없어 OT의 믿음의 사람들조차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온전히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9:15에서 증거한 바 있다.

말(言)도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것은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우리는 어느 민족의 말보다도 과학적이고 온전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아시아지역에서 조차 미개(未開)한 말은 복수(複數)가 없어서 같은 낱말을 반복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2) 율법속의 제사가 참 제사였다면 그렇게 수없이 반복될 필요가 없이 온전해지고 다시 죄의 고통에 힘겨워할 필요가 없이 끝냈을 것이라는 있을 수 없는 가정(假定)이다.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3) 레위기 4~5장에서는 부지중에 죄를 지어 깨닫지 못하다가 생각이 날 때는 죄가 될 것이므로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하고 있다. 대표적인 내용을 두 곳만 보자.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4:13~14)

“만일 부지중에 어떤 사람의 부정에 닿았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레5:3) 이런 이유를 보더라도 율법속에서는 온전한 죄의 용서란 있을 수 없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4) 히브리서에서 OT 율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사용하는 표현이 “능히 ~하지 못”한다는 표현을 상당히 자주 사용하고 있다.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3:19);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5:4);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5:13);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7:19);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10:1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11:6);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12:25)”

율법속에서는 어느 것 하나 가능한 것이 없다. 이러한 표현과 다르게 한 마디이지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는 말씀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짐승의 피가 능히 사람의 죄를 완전히 없앨 수 없는 것은 수없이 강조된 사실이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속죄를 위해 예비되었고 준비되었던 것이다.



Ⅱ.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예수(5~7)

신앙의 선진(先進)이요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시편에서 많은 찬양으로 하나님의 뜻을 증거했던 다윗의 메시야 예언구가 역시 인용되고 있다. 물론 다윗도 어느 임금 지지 않게 많은 제사와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짐승의 피나 제사가 아님을 알았음을 고백하는 시편40의 내용이다.

인용되고 있는 말씀을 그대로 가져오면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시40:6) 한 것인데 수없이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 다윗이 하나님께 깨달은 것이다.

믿음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은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누구나 바르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서 이러한 표현은 자긍심과 감사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직접 진리를 가르치셨음에도 오히려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친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은 한 마디도 바로 들을 수 없어서 오해를 하는 것을 복음서들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므로 깨달아 진다면 그것부터 엄청난 은혜요 찬양할 이유인 것이다. ‘왜, 그 수많은 사람들이 건전치 못한 사이비에 콩깍지가 씌어 빠져나오지 못하고 평생을 허비하고 영원을 허비하는가!’ 바른 진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5) 중간의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라는 내용이 앞뒤의 이 땅에 성육신(成肉身)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인용하는 의도이다.

시40:6을 여기서는 v5~6 두절로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눈 여겨 볼 것은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했다면 연이어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6) 하신 것이다. 어찌 보면 OT에서 하나님께 드린 제사의 모든 종류를 원하시거나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백성이 타락했을 때 선지자를 통하여 탄식하시는 내용을 보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

사실 하나님께서 제사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며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수없이 하셨지만(삼상 15:22; 시40:6, 51:16~17; 사1:10~13, 66:2~4; 호6:6; 암5:21~27) 자주 인용되지 않는 말씀을 한 곳만 인용하면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요구하지 않으신 것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렘7:22~23)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7) 사실 요한복음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OT성경에 예언된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이것은 주님의 교훈뿐만 아니라 구속과 제사의 완성을 위해서도 오셨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OT의 모든 제사나 율법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요 계획이요 그림자였다는 감격스러운 이야기이다.



Ⅲ. 예수의 몸으로 드려진 제사(8~10)

이제 오늘 마지막 세 절은 앞에서 인용하였던 시편40:6~8의 이 히브리서 저자의 해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서로 대조되는 형태로 비교하고 있는데 v8은 5~6의 확인이라면 폐하시는 첫 것 그런 다음 세우시는 둘째 것을 말하면서 이 폐하고 세운 것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려 지심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8) 그러므로 반복된 확인이며 “위에 말씀하시기를…” 완성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복음만이 완전한 것임을 이해시키려는 권면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이 아니라 오늘 복음 속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호소이다.

오히려 맨 뒤의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한 것으로 다만 순종을 보시고자 주어진 법 즉, 율법이로 명령하신 것이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 것이라고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으로 드려졌던 피의 제사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으므로 폐하여 진 것이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진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시고 세우신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을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9) OT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명령된 것을 반복했을 뿐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해하시는 아들은 막연한 반복이 아니라 바로 그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셔서 이루었다는 고백이다.

이래서 종의 종교와 아들의 복음은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광명천지 같이 복음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드러났음에도 OT의 율법들을 흉내 내고 있는 사람들은 종의 종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라고 평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9f)하신 것은 마치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 말씀하셨으니…”(1:2f) 하셨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도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면 어떤 입장에 있던지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는 믿음과 고백으로 세워져야 복음을 위해 세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9b) 언젠가 성경에서 그것도 율법 속에서 언제나 “첫째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 즉, 하나님의 것이라 했는데 그 첫 것을 폐하신다는 것이 율법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이러한 논리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있었던 처음 창조를 멸하시고 하늘로부터 거듭나는 두번째 탄생을 더욱 가치 있고 영원하게 하심도 이러한 이치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우셨지만 그 가치가 하늘의 가치가 되지 못하고 땅의 가치, 어두움의 가치 지옥의 가치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맞지 않기 때문에 폐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이런 이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f)하시던 이 세상도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는 비극적인 운명에 놓여 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 지금까지 논(論)해온 제사보다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고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의 드리심이 모든 인류에게 유효하게 됨을 증거한다.

이미 앞에서 이를 인정하고 찬양했던 내용과 같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2:11)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제사를 드려도 다시 드려도 죄가 용서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그런 온전하지 못한 짐승의 피의 제사가 아니라 한번으로 정결케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성결이었다.

이렇게 한번으로 모든 사람들이 거룩함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여러 번이 아니라 단번에 거룩함을 얻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마지막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OT의 이스라엘은 그림자의 시대에 종으로 살면서도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긍심을 갖고 실체에 비춰진 그림자를 보면서 더 좋은 온전한 언약과 하나님의 참뜻을 모르고 확신도 없는 일들을 계속 반복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림자가 아닌 성경에 예언된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사죄의 감격을 사실로 체험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신 생명과 진리에 속한 은혜를 누리는 시대에 우리가 살며 영원을 약속 받은 하늘로부터 거듭난 생명의 능력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 되었다.

처음 것은 지나가고 허물어지고 폐해지고 자신을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진 새 언약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각자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라는 고백으로 OT시대에는 없었던 성령과 더불어 감격하며 섬기는 하늘나라의 제사장 다운 천국백성으로 살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