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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0:11~18 2022-07-31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제물로서 속죄를 영원히 온전케 하시고 완성하신 사실을 결론한다. 불완전한 반복하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오늘 말씀의 시작에서부터 이를 잘 비교해 주고 있다.

“드리되, 드리시고”는 다르지 않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매일 서서 섬기며”와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서있는 것은 아직 진행형이다. 그러나 앉은 것은 일을 완성하신 것이다. 끊임없이 진행해야 하는 율법의 제사와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제 완성하여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 후에 심판의 자리에 친히 재판장으로 앉으실 것을 예언하신 것은 유명한 말씀이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25:31)

무엇보다도 대속의 희생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16:19)는 증언도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셔서 구속의 역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누구보다도 더 분주히 일하셨다.

대개의 경우 음식장사 하는 사람들은 정작 식사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남들이 다 먹고 난 후에 자신들의 식사를 챙겨 먹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 표현대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행도 다르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주로 인류를 섬기시기 위해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마가의 기록 속에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막3:20) 하였고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6:31)는 기록들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제사장 보다도 분주히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셨다. 그러나 이제 그 섬김을 완성하시고 하나님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 사실은 이미 이 히브리서를 시작하면서도 증거한 바 있다.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b)

이제 다음 시간부터 이 히브리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지금까지의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죄와 은혜를 믿음의 삶에 실천할 것을 권면하는 좀더 우리에게 사실적인 도전을 주는 말씀들을 나누게 될 것이다.



Ⅰ. 한 영원한 제사(11~12)

이 결론적인 내용에서도 역시 불완전을 다시 한번 거론하고 완전을 제시한다.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제사는 아무리 자주 그리고 같은 제사를 반복한다고 해도 죄의 근본을 뿌리뽑을 수 없기 때문에 사죄의 유쾌함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비록 하늘에서 보여주신 이상과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죄를 말끔히 용서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미래의 메시야 시대의 사죄를 믿음으로 내다보면서 사모했던 내용을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라고 했고 바울 사도는 이를 인용하는 내용을 로마서4:7~8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이 땅에 성령께서 오시고 교회가 세워진 후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한글) 라고 증거하고 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11) 이 말씀은 이미 v1b에 증거했던 내용과 거의 다르 않다.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여기 v1b과의 차이는 ‘매일 ≒ 해마다; 같은 제사 = 같은 제사;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는 구조를 볼 때 크게 차이가 없다.

결국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11)라는 약속이 불확실하면 매일 섬기는 것도 자주 드리는 제사도 별다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이미 서론에서 다룬 내용과 같이 “매일 서서 섬기며” 라는 종의 종교는 평생동안 섬기고 자식들이 계속해서 섬겨도 그 종 노릇은 끝날 수 없는 상징도 볼 수 있다.

여기에 비하여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2) 라는 “한 영원한 제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온전하고 영원한 효력을 가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치 않는 하늘에서 드려진 제사이다.

이 v12은 히브리서의 분수령 같은 귀중한 확신의 교훈이다. 계속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불완전한 많은 OT의 율법 속에 제사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두 번이 필요 없는 완전한 제사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앞의 8:1b에서도 “…그가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라고 확인하였고 12:2b에도 믿음의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제사의 일을 완성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복음을 완성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증거하기 위하여 희생을 당하는 주님의 충성된 증인인 스데반이 죽음을 당할 때는 하나님 우편에서 일어서셔서 맞는 모습을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스데반이 증거하고 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 56)

수많은 연대에 걸쳐서 수많은 제사장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매일, 절기마다, 그리고 매년 반복했던 짐승의 제사로는 영혼의 유쾌함이나 개운함을 얻지 못하였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이 역사 오신 흠 없으신 어린양으로 비유[계5:6~22:3 27회 (13:11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땅에서 올라온 짐승)]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시고 과거 땅에서의 제사장들은 두렵고 떨면서 들어갔던 그 지성소인 하나님 우편에 단번에 들어가심으로 역사 속에 믿음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장 가까이는 오늘 우리가 온전한 사죄의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 할렐루야!



Ⅱ. 온전한 제사를 증언함(13~16)

인류의 속죄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면서 이제는 어두움의 하수인들이 완전히 정복되고 진정한 역사의 왕으로 또는 심판주로 행하실 때를 기다리시는 동안 계속 이 완전한 속죄의 역사는 땅끝까지 증거되고 성령과 말씀이 이 구원의 역사를 마칠 때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의 제사로 영원히 거룩함을 입은 복음의 역사에 대하여 성령께서 증언하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대선지자들도 이미 기록된 사실을 통하여 이를 확인해 주고 있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13) 이미 1: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했던 내용처럼 시편110:1의 메시아에 대한 인용으로 완성하신 구원을 세상 끝날까지 이루고 지켜갈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범위에서는 어그러진 우주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역사로 어둠의 세력인 마귀를 멸하시는 일 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까지도 이미 예정된 때와 계획이 성취되어야 완료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도 이미 2:14b에서 증거한 바 있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이런 이유로 인하여 이미 순교 당한 영혼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에도 하나님께서는 같은 답변을 주고 계시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6:9~11)

이제 한번의 희생으로 온 인류를 온전케 하실 수 있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려진 제사는 완료되고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된 예정을 따라 마귀 사탄을 완전히 굴복 시키기 까지를 기다리시는 아들의 또 다른 순종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14) 이 말씀에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가 완료형으로 쓰여진 반면에 “거룩하게 된” 즉, 그 온전한 약속을 받는 자들의 거룩은 진행형으로 쓰여진 것이 특징이다.

이 10:10에서 이미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하였고 다시 v12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였다면 여기서도 “한 번의 제사로” 흠 없으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를 반복 확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그 은혜는 구별된 거룩한 삶으로 진행되고 완성되는 시기는 아직 주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미래적이다.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15) 이 역시 계속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선포를 증거하고 있다. 8:8에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하실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으로 10: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면 다시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라고 성령께서 증언하신다고 증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성령의 증거는 이미 앞의 3:7에서도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라고 하였고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무엇 보다도 기록된 성경은 모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벧후1:21; 딤후3:16)은 요즘 우리가 성령에 대한 말씀의 나눔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16) 예레미야의 예언을 다시 인용하는 것이지만 앞의 8: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한 것인데 언약을 둘 위치를 바꿔서 증거하고 있다.

단편적인 두루마리 책에 기록되었던 하나님의 계획이요 예정을 이제는 그의 백성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세길 것을 예레미야의 예언으로 천년에 가까운 과거의 예언으로 기록되었던 것을 오늘에 가져와서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이 귀한 새언약의 약속은 다음 절과 더불어 더욱 귀중한 약속을 주고 있다. 유명하다는 박물관에 보관된 옛날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던 하나님의 말씀들은 지금도 보존이 되고는 있지만 그 재료들은 몇 천이 지난 오늘 우리가 펼쳐서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TV역사 특집 프로그램 같은 데서 어떤 오래된 성경이 보존된 어느 박물관을 찾아서 어떤 나이 많은 수사(修士) 같은 사람이 다 떨어져 나가고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지는 성경을 보여주는 예를 가끔 볼 수 있다.

결국 부스러지고 언어적으로도 후대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지혜 있는 사람들이 보완적인 방법을 마련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두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자유스럽게 읽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록된 도구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 두기에 온전히 어울리지 않는 것이 영원에 속한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잘 이해하는 요한 사도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는 증거도 이러한 사실들을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물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16b)는 것도 육신적으로만 이해한다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바스러지고 희미해지는 종이에 기록하기 보다는 믿음의 사람들 대대로 구전(口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죽고 또 죽어 사람들이 계속 바뀌고 세월이 흐른다면 말씀은 감소되거나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단순히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불변하시고 온전하신 성령께서 마음과 생각 속에 확인해 주신다면 단순히 구전(口傳)되는 정도가 아니라 완벽하게 처음 상태로 보존이 가능할 것이라는 증거이다.



Ⅲ. 완전히 지워버린 죄(17~18)

앞의 성경의 불멸과 불변의 언약과 함께 과거 OT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한가지를 복음 속에서 다시 증거해 주고 있다. 그것은 역시 용서된 죄가 다시는 정죄(定罪)의 효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없애 버린다는 약속이 그것이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17) 이러한 언약이 사람이 한 것이라면 우리는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명한 언약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이 언약이야 말로 OT의 즉각적이고 인과응보적(因果應報的)인 죄의 형벌에 힘겨워했던 다윗조차도 너무나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머리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도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는 다는 것을 복음 후에도 분명히 증거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f) 이것은 OT의 에스겔을 통해서도 강조되고 있는 사실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18:4, 20)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 죄의 대가로 죽을 수밖에 없이 운명 되어진 것이 사람이다.

다윗의 고백과 감격을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여기에 죄에 대한 묘사와 해결의 내용은 이 시간에 다 나눌 수 없다. 그러나 “사함[נָשָׂא, (죄를 무거운 짐으로 묘사하여) 들어올리다, 치우다]” “가려진[כָּסָה, 덮다, 숨기다, 감추다]”는 의미를 볼 수 있다.

여기에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하신 약속이다.

이 내용에서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하는 것은 덮어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덮어지는 것으로는 온전하지 못하다. 세상천지에 흰 눈이 소복이 쌓이면 모든 더러운 것들이 하얗게 덮여서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표현대로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하였지만 눈이 녹고 나면 다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의 절망 속에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최종적인 순종으로 βάπτισμα를 받고 나면 자신이 변한 것이 아니라 다만 나의 겉에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과 같다(갈3:27). 마치 야곱이 에서의 겉옷을 입은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두번째 사죄의 교훈은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시는 약속이다. 비록 처음에는 죄의 사람으로 나는 전혀 다름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입은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봐 주시지만 이제 성령께서 오셔서 나를 움직이시고 나와 함께 사심으로 겉을 가리는 모습을 넘어서서 하얀 양털이 안에서부터 길어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경의 삶으로 성숙해질 것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이런 주님의 약속 때문에 처음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f)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b)라는 약속이 따라붙은 것이다. 구원은 나 자신이 주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구원의 주님이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제 보다 더 분명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8) 이보다 더 완벽한 언약이 이사야를 통해서 주어지고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

죄를 완전히 도말(塗抹)하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 하였고 “도말하다[מָחָה, 씻다, 닦아내다, 지워 없애다, 제거하다]”라는 의미들은 단순히 가리고 덮는 것 이상으로 없애 버린다는 언약이다.



과거의 율법속에서는 아무리 경건하게 드린 제사처럼 보여도 온전한 죄의 용서를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은 불완전한 사람이 중보 하고 사실이 아닌 하늘의 모형을 따라 흉내를 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셔서 땅에서 난 불완전한 짐승의 피가 아니라 완전하신 자신의 피로 하늘의 지성소에 직접 들어가셔서 인류의 죄를 사죄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더 이상 부스러지고 흐려지는 양피지나 파피루스 같은 종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심령에 성령으로 세기셔서 더 이상 흐리거나 읽지 못할 하나님의 법이 없고 다만 순종만이 유효하게 하셨다.

사람들처럼 잘못을 기억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실상 사람은 마음 깊이 감춰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꺼내 갚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아들의 희생의 피를 인하여 우리의 죄를 그 자리에서 온전히 옮기셔서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라고 약속하신다.

이제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영원한 형벌을 당할 죄를 용서받은 자 답게 사죄와 은혜의 삶을 성령과 더불어 감당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