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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0:26~31 2022-08-14
너희는 생각하라,  
다른 서신들과는 다르게 유독 경고가 많고 이 실천편을 시작하면서도 경고로 시작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독특성 중의 하나이다. 이미 2:1~3, 3:12~13, 5:12~14, 6:4~8 같은 데서 봤고 12:25~29에도 같은 권고를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결코 미움이나 시샘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것임도 증거하고 있다. 12:5~13에서는 솔로몬의 잠언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고 채찍질하신다고 인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을 먼저하고 말하기 힘겨운 것을 나중 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땅의 이치가 아니라 하늘의 이치와 사랑으로 권하는 이 훈계는 쉽지 않은 경고를 먼저 주고 진지하게 신앙의 권면을 주려는 이치를 본다.

당시 이스라엘의 후손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성도들은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회유를 당했고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그들에게 모든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떠난다면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경고형식의 권면을 주고 있는 말씀이다.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도 없었고 율법도 몰랐던 오늘 우리들에게는 더 중요한 권면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동양종교를 거쳐서 마지막으로 찾게 된 복음을 버린다면 더 이상의 인간구원의 도(道)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형편과 이치(理致)를 깊이 생각하라는 권면이 오늘 말씀이다.

오늘의 말씀은 상당히 무거운 교훈이 될 것 같다. 하여 달리 결론을 맺지 않을 것이다.



Ⅰ. 진리를 맛본 자의 책임(26~27)

안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을 가진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이치를 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대단히 감사해야 할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이치를 잘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들어도 믿고 순종하는 것은 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준비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알고 행치 않은 사람들의 책임을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7~48)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사랑 때문에 섬기기 보다는 ‘지옥 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소극적인 이유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26) 라는 어찌 보면 두려운 경계를 주고 있다. 여기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세상의 진리 즉 그리스시대의 철학에서 논하는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바로 구원의 이치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요8:31f) 적극적인 권면을 함께 생각하게 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b~32) 분명히 구원의 진리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섬기면 죄에서 자유와 온 갓 허황된 세상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럼에도 진리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 후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은 그냥 종교를 바꾼 정도가 아니라 큰 비극인 것이다. 왜냐하면 죄에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요 마지막 방편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것을 놓아 버리면 더이상 찾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26) 라는 훈계는 이미 앞에서 이미 경고한 바 있는 6:4~6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또 더 이상 다른 구원의 소망이 있을 수 없다는 데서 베드로 사도의 경고(警告)와도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1~22)

다음에 연결되어지는 내용과 함께 다르지 않은 의미임을 확인하게 된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27) 이런 입장에서 생명의 진리, 구원의 진리를 알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막연히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보다도 바른 진리를 알고 예배하는 우리들에게는 책임이 더 크다는 사실도 의식해야만 한다. 여기에 야고보도 같은 경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26) 그러나 이 말씀을 극단적으로 이해하여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바라심이 아니시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듣고 믿고 구원을 얻은 후에도 범죄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요한 사도를 통하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는 사죄의 은혜를 분명히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26)한 것은 진리요 생명의 주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10)는 진실한 사죄를 구하는 것이 옳은 것임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사람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속의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외면해 버린다면 하나님은 온전히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27)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힘입어 사죄를 얻었다면 마귀 사탄을 향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의 반대편에 하나님의 대적으로 서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죄를 해결 받은 사람들은 이제 죄와 상관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데리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움으로 기다린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소망과 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과 이제는 변화무쌍한 죄 많은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기대로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바꿔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실제로 뵐 날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모습인데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는 두려움은 분명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지 못한 사람의 자세요 모습일 것이다.



Ⅱ. 거역하는 것은 아들을 짓밟는 것과 같다(28~29)

온전치 못한 율법에서조차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사람은 즉각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으로 온 인류를 단번에 죄에서 구원하신 희생의 피를 가치 없게 여기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베푸시는 성령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욕되게 한다면 그 형벌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는 은혜를 외면한 사람에게 좀더 직접적인 경고의 내용이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28) 앞에서 율법 속에서의 제사의 무가치함을 다루었지만 그 율법 속에서도 형벌은 즉각적이었다. 가령 신명기17:2~7 같은 내용을 보면 남녀에 상관없이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v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 제도는 물론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법이지만 OT에서는 이 법이 악용되어서 의인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 했던 나봇 같은 사람이 이세벨의 간교한 술수와 그와 동조하는 나봇과 함께 사는 성의 유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함을 열왕기상21장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데도 이 법은 악용되었던 것을 주님께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당하시는 과정에서 거짓증인들을 세워 자신들의 사형판결을 합리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마26:60; 막14:56~59).

그럼에도 비록 억울하게 이런 육신적인 죽임을 당했을 지라도 그것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원 속에서는 회복시켜 주시겠지만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자신이 대신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린다면 거기에는 응분의 형벌이 주어질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28) 이라는 과거의 율법에서 하나님이 아닌 우상숭배를 부추기는 첫째 계명을 어긴 사람들에 대한 형벌(출20:3~6)로 OT의 법에서는 어떤 범죄보다도 중한 범죄로 다스려졌던 것에 대한 형벌이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29)

그럼에도 복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법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하는 것은 과거 가장 무서운 저주의 대상이었던 우상숭배 하는 죄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운 경고이다.

여기 “당연히 받을 형벌[τιμωρία, 복수, 보복, (당연히 받을) 대가(代價)]”은 3가지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배신 행위와 함께 도저히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씻을 수 없는 범죄 행위에 대한 대가라고 선언하고 있다.

①하나님 아들을 짓밟고[καταπατέω, (비유적으로)모욕적으로 대우하다, 경멸하다, 멸시하다], 구속의 주님을 배반하는 것은 단순히 속죄 사역을 거부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②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앞에서 봤던 대로 여기 언약의 피는 불완전한 과거의 짐승의 피와는 다르게 마음과 양심까지도 정결하게 하는 생명의 회복이며 능력임에도 과거 짐승의 피와 같이 가볍게 여긴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모든 복을 차버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형벌은 당연한 것이다.

③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성령의 별명이 상당히 여러가지임에도 “은혜의 성령”은 NT에 딱 이곳 한 곳에만 나타나는 것이 특별하다. 구속의 완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질 은혜의 성령은 OT의 메시야 예언의 책인 스가랴12:10f에서 예언된 말씀이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

이 언약은 구속의 역사가 완성되고 약속대로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임하였고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인침으로 주셨던 구원의 완성의 확인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고 회계하고 순종하여 말씀을 순종하여 거듭난 자들 모두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약속이다.

그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막3:29) 하신 것처럼 성령을 모욕하는 죄이며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마지막 과정으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구속의 피를 거절하고 배도(背道)하는 것은 당연히 받을 영원한 저주의 형벌 외에는 받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였던 유다의 권면을 이해하게 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1:3)



Ⅲ.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30~31)

오늘 마지막으로는 바로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형벌 당할 것을 성경을 통하여 확증하는 것으로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인 공의(公義)로 인한 심판을 두려워하라는 권면을 주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양지(陽地)와 음지(陰地)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구원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주시는 것과 반대로 그 전적인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오히려 대항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한 형벌이 준비될 수밖에 없는데 은혜를 거역한 자들이 당할 심판을 두려워 하라는 당부를 주고 계신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30f) 로마서12:1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을 향하여 친히 보복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을 증거한 바 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본래적인 배경은 자신의 백성들을 친히 보호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인용된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신32:35f표준새)

그럼에도 하반절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30b) 한 것은 전반절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비슷한 배경을 두 곳 정도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시50: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시135:14f)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폐부와 심장을 살펴 아시는 분(렘20:12)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의 백성들의 중심도 아시고 진실된 사랑과 그렇지 못한 것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가룟 유다를 아셨듯이 배은망덕할 자를 이미 아시고 그들을 위해 준비하시는 것은 당연히 맹렬한 진노뿐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에 계실 때도 달란트(마25:14~30)와 므나(눅19:11~27), 그리고 포도원의 비유(마21:33~41; 막12:1~9; 눅20:9~16)나 여러가지 교훈 속에서 충성된 자기 백성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말씀하신 바 있고 그들의 행한 대로 보응하심을 증거하셨다.

그러나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라면 심판 받는 대상은 되지 않을 것임으로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만큼 예수 그리스도나 그의 충성된 일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전함을 수없이 증거한 바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충성된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상을 더 분명히 약속하고 계시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롬2: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31) 오늘 나눈 v26~ 말씀의 결론이다. 이 말씀은 v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는 내용과 비슷한 이해를 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감사는 이와는 반대이다. 405:1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절대로 그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실 분이시다. 오히려 모든 대적들로부터 건지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시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시17:8) 하였고 성전에 올라가는 성도는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8)라는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OT에서만의 약속이 아닌 것은 복음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 말씀하셨고 바울을 통해서도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3:3)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의지하여 믿음의 삶을 계속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두려움으로 심판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