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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1:1~3 2022-08-28
믿음은,  
NT에서 신앙의 대표적인 주제를 다룬 3장의 성경은 아가페적인 “사랑”을 다룬 고린도전서 13장과 “부활”을 논하는 고린도전서 15장과 더불어 오늘부터 나누게 되는 “믿음”의 실제적인 증거를 다루는 이 히브리서 11장이다.

그러면서도 확인해 볼 것은 NT에서 복음과 구원의 세 기둥 같은 이 3서신들은 역시 문장구조 조차도 서로 다른 형태를 사용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먼저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아름다운 시(詩)요 사랑의 노래 같은 찬가(讚歌)라면 “부활”의 장인 15장은 나타난 전후 좌우의 논리들을 사용하여 증거하는 논문과 같은 체계를 볼 수 있다.

반면에 이 “믿음”을 실증(實證)하는 이 히브리서 11장은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가져와서 믿음을 가진 선진들의 삶과 결과를 확인해보고 오늘 우리의 믿음을 비교해 볼 수 있는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역사서’ 같은 장이다.

OT성경에서는 복음이후처럼 믿음이 강조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두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한 낱말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אָמַן, 확실하게 하다, 지지하다, 충실하다, 믿다 110회]” NT에서 귀중한 믿음으로 인용하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b) “[אֱמֻנָה, (지지하다, 신실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견고함, 확고부동, 신실함, 충실, 성실을 의미한다. OT성경에서 50회]”는 두 곳에서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복음 속에 “믿음(πίστις, 244회)” 그리고 대부분 ‘신실성, 믿음직한’ 의미로도 번역되는 “(πιστός, 66회)” 합친다면 책의 분량과 더불어 비교할 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임을 이해하게 된다.

바로 앞장과 연장선상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은 10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을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로서 적어도 하나님의 언약을 누릴 수 있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런 믿음으로 산 선진들과 같은 삶이 되지 못하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없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항의하던 종교지도자들과 달라야 한다는 경계이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는 저들의 항의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39~40)고 책망하심을 볼 수 있다.

이 11장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중심하여 홍수 이전의 3사람 아벨, 에녹, 노아를 거론(4~7)하고 신구약을 막론하고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8~19)을 다룬 후 다음으로 아브라함 이후의 4사람; 이삭, 야곱, 요셉, 모세(20~30)를 확인한다. 그 이후의 라합을 비롯한 성경에 쓰여진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인물들과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을 마지막까지(31~40)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오늘 함께 다루게 되는 이 3절은 뒤에 거론하는 믿음의 조상들이 가지고 살았던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이 믿음장이라고 하는 11장의 서론이다. 이 서론은 과거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가능케 했던 동력(動力)이라 볼 수 있고 그 원리는 완성된 복음의 시대인 오늘 우리에게도 바뀌지 않은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생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삶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에는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믿음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있는데 믿음의 미래 지향적인 소망과 기대를 강조하는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 중요한 두 낱말은 “실상과 증거”를 보는데 이 두가지가 확인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믿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f)

“실상[ὑπόστασις, (~아래 두다, ~아래 서다에서 유래) 본질, 실체, 확신, 계획]”이 이 히브리서에서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같은 낱말이 1:3f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쓰였고, 3:14f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이라고도 사용되고 있다.

이 전반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믿음의 정의를 2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①현재에 속하기 보다는 믿음은 미래에 속한 것이다. 이미 얻은 것이라기 보다는 아직 완전히 얻지 못한 장래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현실 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초대교회의 견디기 힘든 박해 속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초연이 미래를 확신하면서 그 어려움의 시기를 기꺼이 견뎠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삭이나 이스라엘이라는 야곱도 역시 미래에 주실 더 큰 약속을 기대하고 바라면서 현실의 고달픈 삶을 꿋꿋이 지켜낸 사람들이다.

②이렇게 아직 얻지 못한 미래의 약속을 현실로 누리는 삶이었다. 미래를 오늘에 당겨서 사는 것이라는 데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미 현실에 얻은 것처럼 확신하는 것이라는 데서 현실이 바뀌지 않았지만 이미 바뀐 것처럼 확신하고 행동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런 입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고달픈 세상에서 이미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것을 비유로 표현하기를 믿음은 꾀꼬리 알속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다는 비슷한 표현들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아직 손에 없는 것이지만 이미 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b) 이것은 앞의 전반 절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결국 같은 의미의 확인이다. ‘바라는 것들’은 ‘보지 못하는 것들’이고 ‘증거’는 ‘실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영적인 세계의 사실들과 장차 나타날 것에 대한 기대를 묘사하는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보지 못하는 것들”은 당시의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λόγος나 ἰδέα’처럼 보지 못하는 절대적인 존재이거나 하늘나라의 것들이 아니라 비록 아직 보여 지지는 않지만 미래에 나타날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여기 “증거[ἔλεγχος, 증거, 확신, 책망]”는 명사형으로서는 NT에는 여기에만 쓰여졌지만 동사형(動詞形)인 “책망하다[ἐλέγχω, 드러내다, 폭로하다]” NT에서 여러 형태로 자주 쓰이는 낱말이다. 믿음 자체가 보지 못하는 장래의 것들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용어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졌다고 구원의 비밀을 선포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든 나타난 것들을 기초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유물론적인 자연관이나 과학적인 이론과 같이 이미 나타난 어떤 것들에 의존하거나 기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이미 약속된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담대하고 진지하게 나아가는 소망과 기대의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이 믿음을 갖은 사람과 불신의 간격으로 말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세상 사람들처럼 나타난 사실과 이론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분석을 하고 그것을 기초로 오로지 나타난 검증된 것들을 기초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설계하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다. 만약에 믿는다는 사람이 이렇게 보이고 나타난 것들만을 기초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이미 그들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다.

이런 입장에서 믿음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정신나간 사람들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명과 명령을 따라 산 사람들이 누렸던 약속이 보다 분명한 증거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다음 절에서 강조하고 있다.



Ⅱ. 확실히 검증됨(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부족 사회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갈데아 우르를 떠나는 것 자체가 당시의 부족국가(部族國家) 씨족사회의 보호의 범주를 팽개치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선 것은 전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쩌면 졸장부처럼 처신에도 용맹도 없는 아브라함이 이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의 결과를 두고 오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추앙받고 있다. 사실 믿음의 조상들은 어느 때든지 그들의 세상과 사회에서 환대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표현을 이 믿음의 장을 끝내면서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6~37)라고 증거한다.

신앙 때문에만 당해야 하는 이런 사람으로서는 그런 억울한 불이익에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38) 평가한다. 신앙한다는 사람들 중에는 늘 두가지 형태만 있다.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여기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는 것은 뒤에 거론되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로 앞에서 정의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언약대로 받았고 칭찬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믿음의 증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OT성경과 이스라엘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그 구체적인 사례들이 다음 주부터 다루게 될 v4이하의 기록들이다.

특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는 증거는 오늘 그들의 믿음을 따르는 우리들에게는 엄청난 복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에게는 이런 믿음의 선진들도 없는 상황에서 지금 우리보다 더 막연한 순종이 될 수도 있었는데도 믿음을 지켰다는 데서 그렇다.

또 여기 증거는 앞 절의 “증거[ἔλεγχος, 증거, 확신, 책망]”와는 다른 의미의 “증거[μαρτυρέω, 증언하다, 증거하다, 확증하다, 선언하다]”라는 낱말이 쓰였다. 그럼에도 이 히브리서11장에 증거는 “증거했다”라는 능동형보다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증거를 주셨다는 입장에서 수동형으로 쓰여지고 있다. “2증거를 얻었느니라, 4증거를 얻었으니, 5증거를 받았느니라, 39증거를 받았으나,”

사실 같은 단어의 명사형 증거[μάρτυς]에서 “순교(martyr)”라는 말이 나왔다고 할 때 생명을 증거하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에 의해 복음은 증거되었고 이를 히브리서 기자도 바로 시작인 v4부터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4) 세상에서는 증인이 죽어 버리면 방법이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더 확실히 증거됨을 보는 데서도 이 세상의 원리와 다름을 보는 것이다.

이 원리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라는 권면을 이해하게 한다.



Ⅲ. 보이는 것의 이유(原因)(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구체적인 믿음의 선진들 개개인의 믿음의 역사를 다루기에 앞서 믿음의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부분을 전체적으로 정의하는 내용이 서론의 마지막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창세기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요한계시록 마지막장 마지막 절인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1)까지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요 구원의 역사로 그 성경전체 가운데 있는 모든 말씀이 믿어진다고 말한다.

어느정도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도 이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창조의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실 보이는 것들에 목숨을 걸지만 우리 육신의 시각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어쩌면 이 보이는 세계는 그 이면의 볼 수 없는 영향들로 인하여 보여지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많은 어려움이 해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v3의 헬라어 시작이 “πίστει νοοῦμεν”로 “믿음으로 안다”는 의미로 강조적이다. 영적인 세계는 물론이고 많는 보이는 세계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고 또 어떤 것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게 해 주신 것들도 더러 있다고 이해된다.

가끔 하는 이야기이지만 아주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부모가 나를 낳았다는 사실조차도 우리가 의식이 있어 눈으로 보고 인정하는 것이 아닌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아주 가까운 예로 하나님께서 직접 볼 수 없게 하신 것을 우리 각자의 몸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몸에 여기저기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핏줄이다. 만약에 검붉은 피가 그대로 보인다면 아마 우리는 자신을 보는 것도 섬찟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피부를 통해서 그냥 파리할 정도로 보일 수 있게 하시고 직접 비치게 보이지 않게 하신 것이다. 이런 것을 가벼운 예로 들었지만 이런 것들만 찾는다고 해도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창조주 이신 주님께 보고야 믿겠다고 한 도마의 불신을 책망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9) 오히려 보이는 것 때문에 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더 죄 있다고 하는 것은 보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이유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또 야고보는 참으로 사람에게 좋은 것은 보이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 부터라고 강조하기 위하여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고 확인한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f) 여기 “모든 세계”는 단순히 보이는 세계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모든 피조(被造) 세계를 말하면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라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믿음으로 안다고 하였는데 여기 말씀은 일반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명사요 인격이신 “λόγος”가 아니라 “ῥήμα (살아있는 목소리에 의해 말하는 것으로) 말한 것, 말, 발언)”로 태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라는 것처럼 “있으라”하신 말씀에 의해서 있게 된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던 대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믿음이 모든 믿음의 근본이며 바탕이 된다. 오늘 날 진화론자들이 성경보다 더 많은 가설을 만들고 이 세상의 자연 발생을 이해시키려고 하지만 그것은 때마다 장소마다 사람마다 달라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하나님의 창조역사와 비교될 수 없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b) 앞에서도 우리의 보이는 시각능력의 한계성을 지적한 바 있지만 사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빙산의 일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라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는 것을 봐서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하는 바울의 논리를 보면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하신 것인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는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말씀으로 모든 것들을 불러 내셨다. 즉, “빛이 있으라”(1:3), “궁창이 있으라”(6), “물과 뭍이 나눠지라”(9), “광명체가 있으라”(14), “생물들이 있으라”(20), “사람을 창조”(27)하셨다.

오늘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믿고 인정하는 과학자들이 더욱 분명하고 일관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창조를 논리 있게 주장함을 듣는다. 사실 아무리 보이는 증거가 많다고 해도 믿음이 없이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을 자주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감사하게도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이를 믿고 인정하였고 더욱 감사한 것은 오늘 우리(내)가 그것이 믿어지고 받아들여 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감사로 보이는 세계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고 행하는 믿음의 삶을 감당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