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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1:17~22 2022-09-25
믿음으로,  
여기서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사실적인 믿음의 시험과 같은 믿음을 가진 그의 후예들의 미래를 볼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미래까지 바라보고 준비하였던 역시 사실적인 믿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오늘도 중요한 것은 믿음은 생각이나 관념에 머무르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항상 언제 어디서나 실제적인 것이 라야 절망과 죽음에서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면서 사실적인 복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 인정될 수 없는 믿음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10)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고 성경에서도 이런 부분에 사실적인 경계를 주고 있는 부분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예를 NT에서 한 곳만 든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추고 일부만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갔다가(행5:1~2)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 직접 책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벨이나 에녹, 그리고 노아는 홍수이전부터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와 다를 수 있다고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와 꼭 같은 환경 속에서도 현재로서 상상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지켰던 사실적인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데서 오늘의 세 인물들과 계속 이어지는 모세를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의 사실적인 삶에서 나타낸 믿음을 증거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믿음의 장(章)인 믿음의 중심에서 “믿음으로”를 반복하기 때문에 잡은 제목이다.



Ⅰ. 마지막 시험(17~18)

하나님께서 나중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질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데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혹독한 시험을 치르게 하신다. 그것은 어쩌면 근본을 의심해 볼 수도 있을 정도로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까지도 의심케 할 정도의 시험이었다.

오늘 나에게 이런 시험을 하신다면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싶을 시험 이상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생각하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려면 이런 정도의 Test는 통과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17f) 이 사실은 창세기22:1~12에서의 사건을 두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 짧은 표현 속에는 온갖 생각을 다 해보게 하는 일련의 일들이 진행되면서 그럼에도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16)

먼저는 여기 쓰여진 “시험(πειράζω)”이란 말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일이 될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해보다. 노력이 요구되는 점에서 노력하다, 분투하다, 떠맡다, 책임지다. 어떤 사람을 시험하다(test), 검사하다, 조사, 연구하다.] 뿐만 아니라 가끔 ‘유혹하다(tempt)’ 라는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낱말이다.

이 시험이 쉽지 않은 이유를 세가지 정도로 살펴보면 ①그때까지도 인신제사를 요구하는 예는 일반적으로 가나안 근동의 이방 종교에서나 행해지고 있는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일이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하나님께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 일을 시행하였다.

②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로 인하여 갈등하는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21:12b) 약속하셨는데 그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은 어쩌면 앞뒤가 맞지 않는 명령처럼 들렸을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오늘 v18에서도 증거하는 것처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라는 약속이 순종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확신이었음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③무엇보다 힘든 것은 생식이 불가능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에 대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제쳐 두고 이해 불가능한 하나님의 명령을 그래도 묵묵히 순종하려고 불을 들고 땔감을 이삭에게 지우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b) 묻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한번 더 아픔 마음을 참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애지중지하는 자신보다 귀한 이삭이 이렇게 물었을 때의 심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짐작할 수가 없다. 이삭은 어쩌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진행하면서 여러가지 유혹을 받으면서도 혼란과 고통속에서도 묵묵히 진행하는 아브라함은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으로서 자격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17b) 기록하고 있다.

결국 믿음이란 이해가 불가능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임을 아브라함은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늙도록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천사의 예언에 웃고 마는 사라에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 증거하였고 이러한 사실은 NT, OT성경 도처에 기록되고 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42:2)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32:17; 슥8:6; 마19:26; 눅1:37)

특히 여기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하는 것을 조금 더 깊이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이스마엘이 있었지만 인간적으로 만들어진 이 이스마엘은 하나님은 인정치 않으시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말씀하신다.

“외아들[μονογενής, 유일하게 태어난, 단 하나의 = μόνος, 홀로, 혼자서 + γένος, 자식, 자손]”은 우리의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라는 말씀에서 쓴 낱말과 꼭 같은 단어여서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아들을 희생하실 때도 아브라함과 다르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확인이다.



Ⅱ. 부활로 받은 이삭(19)

이 내용은 사실 창세기에서 이삭을 바치는 상황에서는 기록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으로 봐야할 것이다. 앞에서도 인용된 내용을 주석하면서 계속 기록한 예들은 여기서 다시 부연(敷衍)하지 않더라도 더러 있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19f) 앞에서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이미 거론한바 있었다. 직접 인용하지 않은 내용을 한 곳만 인용하면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마리아의 질문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는 천사의 답변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아브라함이 부활 신앙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비록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굳게 언약하신 대로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21:12b)신 약속을 확실히 믿고 행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이삭을 번제로 태워 바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다시 살려 내셔서 자신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최종적으로 이삭을 묶고 칼로 죽이려 할 때까지도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 상황에서 주님의 명령을 전혀 거리낌없이 행하는 아브라함의 나타내는 믿음의 반응에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가 더 다급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창22:11)

이미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창22:13) 상태로 준비해 두셨지만 사람으로서는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너무나 태연히 행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동은 급하게 제지시키지 않으면 일을 내고서야 말 것 같은 믿음의 의연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9b)는 연이어 지는 기록은 이미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졌고 그 제물이 되었던 이삭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적으로 십자가에서 못박히시고 창에 찔리셔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믿음의 역사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3:1)는 기록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우리 주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율법도 주어지기전 사람의 다시 살아남을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기에 이미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자자손손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고 할지라도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묵묵히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했고 듣고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브라함처럼 못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참으로 할 말을 잃게 된다. 다만 우리의 믿음을 아브라함의 수준까지 올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질 뿐이다.



Ⅲ.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20~22)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브라함과 다르지 않은 믿음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잘 감당한 사실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같은 믿음은 이삭 야곱에서 그치지 않고 증손인 요셉에까지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후대에까지 믿음을 끼치는 것이 쉽지 않은 오늘 우리 시대에 역시 귀감이 되고 있다.

또 성경은 장자들에게 분명히 우선권을 줘야함을 율법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야곱의 12아들 중 육신의 장자가 아닌 믿음의 장자인 요셉을 거론하는 것도 특이한 상황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고 야곱의 실제적인 장자권을 기록하고 있는 역대기서의 기록에서도 확인하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5:1~2)

먼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다음 믿음의 계승자인 야곱에게 축복하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20) 여기 기록에도 역시 중요한 것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축복하였다고 ‘에서와 야곱’이라 하지 않고 야곱과 에서에게 라는 순서를 보게 된다.

이삭의 경우처럼 다른 배에서 난 이스마엘과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이삭의 말년에 기도로 얻은 한 배에서 쌍둥이로 난 에서와 야곱을 축복하면서 상황적으로 노쇠하여 보지 못하는 눈으로 야곱을 장자로 알고 축복하는 것이 자신의 실수이기 보다는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축복한 것이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이다.

분명히 장자는 에서이지만 하나님은 아직 에서와 야곱이 배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 롬9:12)는 예언을 하심으로써 장래일을 말씀하셨다.

그런가 하면 이 히브리서에서도 에서의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음을 증거한다.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12:17)

다음으로는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파란만장한 생애였지만 이집트에서 아버지 이삭처럼 이제 눈은 보이지 않게 된 상황에서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21f) 라는 내용이다.

야곱은 먼저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한 다음(창세기48장)에야 다른 11아들을 순서대로 축복하는 내용을 창세기 49장에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의 다른 아들들에게 축복한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다만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한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동생이면서도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몫의 축복을 훔쳐 받은 야곱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요셉의 두 아들에게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올리고 장자인 므낫세에게 왼손을 올려 축복한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창48:17)하면서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18)한다.

그러나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19)며 거절하는데 이 사실도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비록 창세기의 기록에서는 하나님께 경배를 먼저 기록하고 있지만 이 역시 히브리서는 순서를 맞추어 기록하고 있다. 즉, 축복을 마친 이스라엘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최고의 예를 드려 영광을 드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21b)

다만 창세기47:31b에서는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서 저자는 “지팡이 머리에” 라고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실 자음으로만 쓰여지는 히브리어에서 이 두 단어가 מטה 꼭 같다[מִטָּה, mittah, 침상, 침대; מַטָּה, mattah, 지팡이, 막대기].

히브리의 연로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서서 경배를 하는데 있어서 지팡이를 의지하여 경배하는 관습에서 연유된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이고 침상에서 엎드려 마지막 가쁜 숨을 쉬면서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하는 야곱의 모습에서도 충분히 그의 깊은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다르지 않은 묘사이다.

이 두 표현이 모두 다 그의 나이 많아 기운이 없어 무엇인가 의지해야 하는 입장에서도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자 하는 그의 끝까지의 믿음을 우리로 하여금 본받게 하는 표현들인 것이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22)

이제 야곱으로부터 자식들까지 축복을 받았던 요셉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후손들을 다시 이끌어 가실 것을 확신하며 이 사실을 믿음으로 당부하는 창세기 말미의 기록이다(창50:24~25)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비록 이집트의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렸지만 그의 믿음으로 인하여 마침내는 이집트 왕인 바로와 버금가는 영광을 누리고 기근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구원하는 엄청난 역할을 하였다는 데서 장자의 역할을 했다고 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그의 형들의 졸렬하고 초라한 모습들을 더러 볼 수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믿음의 깊이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국 이집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 곳은 아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억시키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회복시키실 것을 믿음의 눈으로 내다보며 그 때 자신의 뼈를 가나안에 가져다 묻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특히 여기 “떠날 것[ἔξοδος, 출구, 나감]을 말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출애굽을 이름으로 한 출애굽기가 된 것이다. 아직 수 백 년의 간격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보는 영혼의 안목을 가진 사람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사실 요셉은 자신의 유골을 꼭 가나안에 묻어야 된다는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실천을 자신처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누리라는 믿음의 권면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 약속은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출13:19; 수24:32)고 이루어 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실 수 있다. 그럴 때 아브라함처럼 기거이 순종해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뿐 아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전능하신 분(롬4:17)이시고 그 전능하심은 누구보다도 오늘 나(우리)를 위한 것이다.

믿음은 현실보다 미래를 약속으로 바라보며 축복하는 이삭과 같은 믿음이며 같은 믿음의 자식에게 축복하고 죽을 때까지도 온 힘을 다하여 경배하는 야곱과 같은 믿음이다.

아무리 영화로운 자리의 최고를 맛보면서도 믿음으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 곳은 아니라고 우리에게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고 살 것을 당부하는 호소가 요셉의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