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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1:23~28 2022-10-02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3~4대에 걸친 믿음으로 산 족장들의 삶을 살폈다면 여기서부터는 족장의 범위를 넘어서 국가를 세워가는 믿음의 지도자들을 거론하고 있다. 그 첫번째 인물인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말씀하셨지만 이미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검증된 인물로 이 모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온유하기 이를 데 없었던 모세가 물이 없어 목말라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시기를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민20:8m)하셨다.

결국 진노한 모세는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민20:10b~11f)므로 기적의 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모세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 되고 마는 것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20:8)시는 선고를 받고 만다.

먼저 이런 부정적인 부분부터 이야기를 하였지만 믿음의 모세를 탄생시킨 그의 부모의 믿음에서부터 세상에 쉽게 사라질 영광보다는 영원 속에서 영광의 상을 기대하여 이 땅에서의 영광을 기꺼이 포기했던 모세의 담대한 역할을 역시 “믿음으로” 였기 때문이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Ⅰ. 모세의 부모의 믿음으로(23)

모세가 태어날 때의 시대적 상황은 출애굽기 1장에 잘 나타나 있다.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난 이집트를 창세기41~44장에서 볼 수 있다. 바로의 통치력이 아무리 탁월했을지라도 7년간 계속되는 기근에서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이해가 없었다면 이집트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위해서보다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한 가정에서 국가가 되게 하시려는 역사(役事)의 과정에서 결국 이집트를 사용하신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이미 계시하신 바 있다.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창15:13)

어쨌거나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출1:8)라는 기록과 함께 자신들 속에서 불어나고 강해지는 이스라엘을 보며 이집트의 왕으로부터 관료들은 자신들에게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의 숫자를 줄이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산파들을 통해서 남자아이가 나면 바로 죽이고 여자아이일 경우에만 살리라는 지시를 바로 왕명으로 내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의 산파들은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허약한 이집트여인들 같지 않아 건강하여 자신들이 이르기도 전에 사내아이를 낳아버린다는 말로 남자아이들을 살렸다(출1:19).

바로 왕은 또 다른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남자아이는 낳으면 악어가 우글거리는 나일강에 던져 악어밥이 되게 하라고 어명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아이의 요란한 울음소리는 아기의 위치를 알리는 것이 되어서 예외 없이 죽이는 형편이 되고 만다(출1:22).

이때에 모세가 나게 되는 데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출2:2b)라고 되어 있고 어떤 이유에서 인지 “더 숨길 수 없게 되매(3),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4) 누이인 미리암이 지켜보다가 바로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이집트의 궁중에서 왕자와 다르지 않게 자라게 된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이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23)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자연스럽게 정리하면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여 석 달 동안 숨긴 것은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이라고 읽을 수 있다. 여기 “아름다운 아이”를 출애굽기에서는 “잘 생긴(준수함-한글)”이라고 묘사하고 있고 스데반은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행7:20)고 표현하고 있다.

모세의 부모였던 아므람[고귀한 사람들]-요게벳[야훼는 영광스러우시다.](민6:20)은 모세를 보면서 인간적인 안목이나 애정에서 보다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임을 볼 수 있었고 그런 이유에서 왕명을 거역하고 석 달을 숨겨 키웠지만 더 이상 인간적인 보호는 불가능함을 알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역청과 나무진으로 물을 막은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웠던 것이다.

결국 석 달 동안 숨긴 것도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러면 왜, 석 달이 지난 후에는 더 이상 키울 수 없었는가 하는 의문은 남지만 모세의 부모의 믿음은 자신들의 노력과 보호보다는 하나님께 맡긴다는 믿음이 더 강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를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의 공주에게 보이게 하시고 심청이처럼 동냥젖이 아니라 친 어머니 요게벳의 젖을 먹으며 자라게 하시되 이집트에서 가장 안전한 궁중에서 자라게 하여 한문과 기술에 모두 능한 사람으로 키워(행7:22)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실 준비를 하신 것이다.

옛말에 ‘사자 잡아먹는 벌레가 사자의 몸에서 자란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결국 이집트를 항복시킬 자신들의 원수를 자신들이 키운 샘이 된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위대한 믿음의 부모 밑에서 위대한 믿음의 일꾼이 자라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결국 위대한 믿음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세상의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는 부모에게서 믿음을 받고 자라서 모세 자신도 왕의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는 믿음의 용사가 된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27f)는 바로 자신의 부모로부터 배운 것이다.



Ⅱ. 상 주심을 바라던 모세의 믿음(24~26)

이 말씀은 믿음 때문에 이 세상의 고난과 수모와 불이익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일꾼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사실적인 은혜의 말씀이다.

이제 이야기는 모세의 부모에게서 모세 자신으로 되돌아왔다. 이집트 궁중에서 자란 모세의 이야기는 성경에 그다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의 장성한 후의 이야기는 출애굽기2:11~15에 기록되고 있다.

어머니 품에서 자라며 자신의 백성들 운명을 전해 들었을 모세는 어느 날 이스라엘 사람을 학대하는 이집트 사람을 죽여 모래에 파묻고 그것이 탄로나자 멀리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서 아내 십보라는 만나고 오랜 후에 하나님을 만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탈출을 이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24) 남자는 청년으로 자라면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이 큰 회사 같은 직장이건 정치적인 것이든 지도급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야심은 누구에게나 일반적인 기대요 소망일 것이다.

그럼에도 모세는 어쩌면 이 주어진 기회를 던져버리는 모습을 바로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가만히 & 조용히 바로의 궁궐에 공주의 아들로 있다가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음에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절하였다는 내용이다.

요즘 형편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그 좋은 기회를 스스로 던져버리는 육신적으로는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기분이 좀 편치 않더라도 후일을 바라며 다소곳이 앉아 있을 수 있음에도 그 특권을 스스로 차버리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의 특권을 모세처럼 뿌리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할 수만 있으면 바로의 공주 같은 자리라도 세상의 영광을 꿰어 차고 싶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도 모세는 그것을 거절하는 이유는 바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그렇게 세상의 보장된 영광을 거절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25) 이집트의 보장된 자리를 거절한 것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했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하고”라 했는데 안락한 영광을 거절하고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러했다.

특히 여기 “함께 고난 받기[συγκακουχέω, 함께 고통을 당하다, 함께 학대를 당하다, 박해를 함께 받다]를” 한 것은 일부러 학대받는 사람들과 함께 학대받는 자리에 그들의 받는 고난을 함께 견뎠다는 말이다.

왜, 그랬는가 하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했는데 자신의 백성들이 학대받으며 사는데 자신이 그것을 알면서도 이집트 궁궐의 향락의 자리에서 죄악 된 영화를 즐긴다면 그것은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리끼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경에서 이집트는 세상으로 상징되는 것을 자주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복음을 증거하며 의를 행하려고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는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누구보다도 죄악 된 세상에서 나(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함께 사람이 되시고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오늘 우리도 모세와 같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세가 바라는 영광은 세상의 왕인 바로에게 인정을 받고 상 받는 것 보다는 영원 속에서 불변하는 영광을 입혀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상주심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26) 아직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나 이해가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런 표현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한 이 땅에 오심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같이 되시고 희생되신 주님을 알고 있는 이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자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이해를 하고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성경 밖에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복음 속에서 바울이 이해하는 것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비록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ὀνειδισμός, 비난, 책망, 모욕]” 일지라도 그것을 큰 재물로 여길 수 있었다는 것은 역시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특히 이것을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것은 산상보훈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주님의 말씀에서 밖에는 해답이 없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이유를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한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보이는 상이 아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상급은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는 것으로 장래 그것도 먼 장래를 기약하는 것이다.

아직 율법도 주어지기 전의 이 모세의 영적인 안목과 믿음의 자세는 오늘 복음 속에 있는 나(우리)를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한 믿음이다. 어느 시대이든지 영원한 훗날을 기약하면서 오늘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과 섬김은 절대로 공치사가 될 수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Ⅲ. 세상권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믿음을 행함(27~28)

앞에서 모세의 이집트 궁중에서의 40년과 미디안에서 목자로서 삶을 두고 증거한 내용이었다면 여기에서는 호렙 산에서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고 나오는 과정에서의 믿음을 증거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세상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는 용기를 배움과 함께 하나님께서 맡겨 주시는 사명을 따라 자신의 이집트에서 배운 학문이나 기술이 아닌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능력으로 세상 권력과 맞서 싸워 마침내 자신의 민족을 종 된 자리에서 이끌어 내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된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27f) 출애굽기2:14~15에서는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이집트 사람을 죽여 모래에 묻은 것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 하는 바로를 피해 미디안으로 도망하는 내용을 보게 되기 때문에 이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건을 다루는 내용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떠났던 이집트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고 이집트를 떠날 것을 준비시키는 자세를 두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출애굽기5장에는 오히려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 후에 백성들에게 벽돌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짚을 주지 않아 노역이 더 심해지자 모세 자신을 원망하고 외면하는 것이 더 안타까웠을 것 같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아론과 함께 하나하나 순종해가는 것이야 말로 바로 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인다. 바로 왕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계속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없이 순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의 원인을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27b)라는 표현이 자연스럽다.

오늘날 신앙에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모세의 모습을 헤아려야만 할 것이다. 보장된 안정을 믿음 때문에 차버리는 모세의 자세는 합리적이지 못할 수 있지만 버린 것 보다 비교될 수 없게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사는 신앙인들이라면 역시 모세와 같은 결단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두려워하고 권력을 두려워하는 소신을 잃어버린 믿음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다. 과학과 편리한 세상의 문화에 익숙해 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경성케 하는 모세와 히브리서 저자의 소신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모세처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의식할 때 주님께서는 그런 믿음과 함께 일하실 것이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28f) 어떤 일보다도 이 행동이야 말로 믿음이 없었다면 이성적으로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이런 일을 시키신다면 과연 그대로 순종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지극히 당연한 신앙의 일에도 순종하기 어려운 우리에게 대문마다 아래 위로 비린내 나는 피 칠을 해 두고 그 집안에 앉아 뼈를 하나도 꺽지 말고 불에다가 구운 양고기만을 먹으며 밤을 지내라는 명령이 오늘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명령된다면 그것을 행할 신앙인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려된다.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주신다면 우리 가운데서는 쉽게 ‘이게 정말 하나님의 명령일까!’, ‘하나님께서 이런 이상한 명령을 주실리는 없다.’라고 합리성부터 따지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 데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렘12:5)라는 경계를 주고 계시다. 평안한 가운데 순종이 안된다면 어려울 때는 더욱 힘들 것이라는 교훈이다.

요즘은 오히려 건전치 못한 교주들이 이런 이해되지 않는 메시지를 전해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더 철저하게 믿고 복종함을 본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비합리적인 명령을 그대로 전하고 실천하게 하는 모세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기뻐하실 수 있는 믿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을 모세와 함께 순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28b)라는 결과를 그들의 믿음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보게 된다.



남자아이가 나면 무조건 나일강에 던지라는 바로의 명령에도 감정적인 애정보다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즉, 하나님께서 쓰실 인물이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있는데 까지 숨기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맡겨드리는 모세부모의 믿음이 모세라는 주님의 일꾼을 키울 수 있는 신앙의 부모였다.

이런 모세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주심을 기대하면서 화려한 이집트라는 세상의 죄악 된 영화를 거절하고 오히려 학대받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과 수치를 함께 견디는 것을 더 귀하게 여겼던 모세였다.

이집트 바로 왕의 진노보다는 비록 눈으로 뵐 수 없는 하나님이셨지만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여 육신적인 생각이나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말씀을 복종하였기 때문에 이집트에 비극이 임할 때도 그것을 면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보호를 누릴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은 단순히 과거 수천년의 역사속에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역사의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들을 같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 같은 은혜와 보호를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