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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엡 2:14~22 2023-11-2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사실상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던 상태에서 우리의 노력이나 대가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로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되고 함께 영원 한 영광의 유업을 약속 받은 복된 삶의 변화를 앞에서 나누었다면 여기서 부터는 그 변화 받은 삶의 행복을 증거하고 있다.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한 가족이 되고 같은 목적과 방향을 향하여 함께 가는 결혼의 원리가 여기에도 있다. 단순히 다른 환경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고 해도 우리는 오히려 대적하던 자리에서 돌아온 형편과 같기 때문에 결혼한 부부의 관계보다도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과거의 어두움의 습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이 관계를 점점 좁혀가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파격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가심을 증거하고 있다.

오늘 내용의 중심 단어(key word)는 바로 화평이다. 지금도 이 지구촌에는 화평이 존재하지 못하고 민족 간에 나라 간에 전쟁이 쉬지 못하고 있지만 결국 사람의 정치적 타협이나 어떤 조건에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없고 서로 물고 먹는 싸움의 더 깊은 원인은 어두운 세력의 역사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룩하신 하나님께 습관처럼 죄를 짓는 우리의 관계를 화해시키시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할례와 율법이라는 장벽을 자신의 육체로 허물어 화해시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그 이름 자체가 화평이시다.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b)는 이름이고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과 사랑관계를 중보 하는 예언자, 제사장, 왕이라는 거룩한 삼중직이다. 이 세가지 직분 역시 하나님을 사람에게 알려 주거나 사람의 죄를 하나님 앞에 해결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 백성을 다루시는 왕의 입장에서도 평화를 위한 직책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화평은 언약에서는 모자라지 않지만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 돌로 되어가고 지어져 가는 진행형임을 이 말씀은 역시 증거해 주고 있다.



Ⅰ.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다(14~16)

막힌 것은 어느 것이나 좋지 못하다. 이런 이유에서 독일은 동서로 구분하는 베를린 장벽을 1989년 11월 9일 헐었고 지금은 과거의 안타까운 아픔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상징적으로 일부를 남겨두고 있다. 독일은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을 세계 앞에 청산하고 오갈 수 없었던 동서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정치, 문화, 경재 많은 부분이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나눠져 있는 것은 안타까운 비극이다. 결국 막혀 있다는 것은 그만큼 폐쇄적이고 서로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뿐 결코 좋은 것이 없다. 물론 범죄자와 일반 사람들은 구분을 하여 막아 둬야 일반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고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에 ‘男女가 有別’하다는 아직 유교의 영향이 심할 때 복음이 들어와서 예배당의 중앙을 막아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드렸던 것들을 지금은 사진 속에서나 보는 역시 중간에 막힌 담과 같은 것이 사실로 우리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의 시작에서부터 이 중간에 막힌 담을 거론하고 있지만 막힌 것보다는 열린 것 즉, 소통이나 교제가 편하고 생산적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을 받았다고 확신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성전을 지으면서도 이방인의 접근이 허용되는 이방인의 뜰은 성전의 변두리에 있었고 이 안타까움은 진정한 성전이셨던 우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있어왔다.

이런 이유에서도 이방인이었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충분한 감사와 감격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수밖에 없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14) 영원히 치울 수 없는 막힌 담을 자신의 희생으로 헐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선포되고 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감격에 찬 고백이다. 우리는 과거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장벽이 버티고 있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는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도 거절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쾅쾅 막혀 있던 사람들이다.

그 담은 하나님께나 선택받은 백성들과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어떻게 허셨는가 하면 “자기 육체로 허시고” 라고 증거하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될 수 없었던 관계가 “둘로 하나를 만드사”라고 확인하고 있다.

모든 좋은 것으로부터의 가로막힌 비극의 운명이었는데 이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의 장벽과 선택된 백성들로부터 제외된 버려진 운명의 사람들이었음에도 영원한 사람들의 숙제였던 이 원수 될 수밖에 없는 저주의 담을 친히 치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심을 감격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영원한 숙제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해결하시는 주님을 그 희생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찬양하지 않겠는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15) 여기서는 중간에 막힌 담을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곧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고 이 과거 선택되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과의 가장 분명한 한계가 바로 거룩한 언약의 문서라고 하는 율법이었는데 이 거룩한 문서라고 하는 율법의 요구를 자신의 삶으로 완성하신 것으로 이제는 간격을 없애시고 선택되었다고 하는 이스라엘이나 그 밖에 있었던 이방사람 모두를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셔서 화평하게 하신 것이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16) 이것은 v14~15의 결론이다. 여기 두번씩이나 “십자가로, 십자가로”를 증거하고 있는데 앞에는 “십자가로 통하여, διὰ τοῦ σταυροῦ” 라면 뒤에는 “십자가 안에서, ἐν αὐτῷ” 라는 대명사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독특한 표현들이다.

결국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던 죄의 담과 유대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던 짐승같이 대우하던 간격이든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즉,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 안에서 없애 버리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 완성된 것이다.



Ⅱ. 차별 없는 하나님의 권속을 만드셨다(17~18)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이나 하나님 없이 살던 이방인 모두 스스로는 율법으로 든 스스로의 경건으로 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고 인정받을 수도 없었던 데서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갖지 못한 형편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인종 간에도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17) v14ff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감사의 고백을 드렸던 십자가로 구속을 완성하신 주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으셨다. “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제자들에게 ‘가셨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언약을 하셨던 것은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임을 약속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두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 대상이 “먼 데 있는 너희”와 “가까운 데 있는 자들” 역시 떨어진 거리상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마음 상태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관계없던 이방인이었던 사람들과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은 아니었을지라도 나름대로 받은 율법을 따라 섬겼던 유대인들을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이 양쪽의 상태에 관계없이 두 대상에게 전한 것은 꼭 같은 “평안을 전하시고, 평안을 전하셨으니” 하신 것이다. 죄를 진 사람이 하나님과의 화해는 제사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OT의 율법의 제사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선민이라고 우쭐대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간격은 사라지고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의 중보로 예외 없이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 주께서 오셔서 전하게 된 화평의 결과를 선언하는 것이다. 역시 방법은 “이는 그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이고 차별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은혜를 얻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속에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었던 안타까움을 제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백성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당연히 “그로 말미암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의 제사(히10:12)를 생각할 수 있고 “한 성령 안에서”는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시므로 그리고 최종적인 영광의 하나님께는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이 어두운 죄의 역사 속에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성품들과 품격들을 모두 거론하고 있다.

옛 언약은 온전치 못함으로 폐지되(히7:18, 8:7)고 그 옛 언약에 예언된 대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모든 안타까운 관계가 개선이 된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과거에 범죄할 때마다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나아갈 수 있었던 제한된 은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는 자마다 바로 뒤에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3:12 한글)



Ⅲ. 완성을 향하여 되어가고 지어져 간다(19~22)

여기서부터 즉, v19~22은 v14~18 내용의 요약하는 것이면서 지난 시간에 다룬 바 있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는 말씀의 확인이다.

여기 독특한 것은 교회를 가족으로 집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 속의 구성요소들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권속[οἰκεῖος, 집(가족)에 속하는, 가족의]” “터[θεμέλιος, 기초의, 아래에 놓인 것, 기초, 주춧돌]” “건물[οἰκοδομή, 지음, 세움, 쌓아 올림, 지어진 것, 건물이나 건축물]” 물론 주인은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여기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주님의 교회를 집으로 가족으로 묘사하는 것은 흔하다(딤전3:15; 딤후2:20; 히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 그리스도를 통한 확인이 “그러므로 이제부터”이다. 그런 후에 과거에는 관계도 없었고 권리도 없었던 비극적인 상태를 부정한다.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외인[ξένος, 낯 설은, 외국의, 낯선 사람, 다른(히13:9)]” “나그네[πάροικος, 이웃의, 외국인 거주자, 거류자]” 이런 표현들이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게 묘사되는 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 본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b)

베드로 사도는 믿음으로 세상을 거쳐가듯 사는 신앙의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고 권면한 바 있다. 어쨌거나 세상에서는 이랬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확인해주고 있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는 거쳐가는 외국인이요 나그네로 살지언정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는 외국인이나 나그네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이 분명한 약속대로 과거는 부정되고 천국의 백성으로 확인된다.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창세 이후로 이 역사 속에 하나님께 충실하게 살았던 성도들과 동일하게 취급되고 하나님을 가장으로 자녀로서 권력을 누리는 한 가족임을 증거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20) 과거의 모든 것들을 허물고 새롭게 세워진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모형적으로 비유하고 있어 마치 어떤 건축물을 보고 있는 듯한 감이 든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고전3:11~12)이라고 터를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흘리심이 교회의 바탕이 되었다는 데서 이 말은 옳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아 자신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마침내 오순절날 이 땅에 세워지고 땅 끝까지 가지고 갈 복음의 터는 역시 OT에서는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고 사도들의 헌신의 터 위에 구원의 복음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증거될 것이다.

이런 놀라운 사도들의 역할을 마음에 두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 예언하셨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의 모퉁이 돌은, 기초 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이것은 다른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과 다름이 없는 표현이다. 어느 교회이든지 그 교회가 성경에 예언되고 승인되는 교회라면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어야만 한다. 머리도 기초도 절대로 다를 수 없다.

다음 두절 속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부족됨이 없지만 현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상관없이 역사 속에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의 교회의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21b)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b)는 독특한 표현을 보게 된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21) 고린도전서3:16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하여 우리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약속대로 거듭난 사람이 성령께서 사시는 성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꼭 같은 성전들이 함께 모여서 유기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우주적인 교회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아직도 땅에 존재하면서 육체의 제한을 받는 성전이지만 성령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영원한 성전이 되어 감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교회의 성장을 數的인 확장이기보다는 내적인 성장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결국 우리 각자는 이미 성전이라고 인정을 받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실 때, 우리를 성전 되게 하시려고 친히 희생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실 때 성령과 더불어 보다 완전하고 신령한 성전이 되어 가는 것이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 앞절에서는 신령한 건물이고 영적인 집인 교회를 먼저 거론하였다면 여기에서는 그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고 능력이 되시는 성령으로 시작하여 그 각자 또는 우주적인 거룩한 집의 주인으로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교회의 기초 돌이요 머리 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모두 나타나 중요하다.

歷史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주도적 역할로 인류의 구원의 役事를 주도해 오신 성령과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님의 품격이 모두 거론되면서 역시 구원의 완성으로서 교회를 증거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지만 이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συνοικοδομέω = σύν + οἰκοδομέω 집을 짓다]” (현재, 수동)으로 쓰여 지어져 가는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은 v21 “되어 가고[αὐξάνω, 자라게 하다, 성장하다, 증가하다]” (현재, 능동)과 같다.

믿음의 사람 각자가 성령과 더불어 신앙의 성장을 힘쓸 수 있고 또 이 추세로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자라게 하심이 사람과 하나님의 협력으로 보이지만 역시 주도해 가지는 분은 성령이시고 각 사람은 단순히 자라게 하시는 성령께 순복하는 것뿐이다.

이런 이해가 맞는 것은 “그런즉 심는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7)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놀라운 은혜에 우리 자신을 한신 할 각오와 소망으로 마무리했으면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었던 우리의 모든 불리한 것들을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허시고 폐하셔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어 주셨다. 우리의 삶의 비극적인 형편을 감사와 화평으로 바꿔 주셨다면 우리의 운명의 변화만큼이나 우리의 삶의 목표와 자세도 거기에 합당하게 바꿔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하나님과 멀고 먼 관계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평안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녀 된 권리를 당당하게 내세우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모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화평과 평안을 위한 섬김과 헌신을 드려야 할 것이다.

아직도 모든 것이 부족함지만 구원의 역사 속에 거룩하게 헌신하며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바쳤던 성도들과 동일한 대우를 해 주시고 유약하고 모자라는 믿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으로 드린 완전과 영원의 제사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우리 각자의 성전이 되어가고 성령과 더불어 충성과 헌신을 드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우주적인 교회로 지어져 가도록 미래에 까지도 복을 주셨다. 이 은혜와 사랑에 합당한 나머지의 삶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