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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살후 2:1~5 2024-07-07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데살로니가서의 중심 주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하였고 이미 세상을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해설한 내용이 전서4:13~18의 내용이었다면 다시 오심의 때를 5:1~11에 다룬바 있었다. 후서의 중심이 되는 이 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직전에 있게 될 사건들에 대해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다룰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과 함께 여기서 경계하고 있는 일들은 벌써 우리의 주변에 빈번하게 나타남으로 주님의 재림이 그다지 멀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다시 오시기전에 반드시 영계는 물론 자연계에 있게 될 여러가지 혼란에 대해서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와 계실 때도 말씀하신 바 있으시다(마24~25장).

어쩌면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가장 마음 써야 할 사실인 배교에 관한 경계를 오늘부터 다음 시간에 두번으로 나눠서 다루고 이 2장의 나머지 부분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사도들로 통해서 전승된 신앙적 교훈을 지킬 것을 당부하면서 기도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우리에게서 점검되어야 하는 것은 거짓된 교훈과 바른 교훈으로 ‘좋은 게 좋은 것’식의 종교생활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먼저 이 2장의 앞부분의 흐름을 정리해 보면 재림에 대한 바울의 답변으로 혼란하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그러한 지나친 반응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1~2) 불법한 사람들의 나타남(3~4) 이를 저지하려는 역사(5~8)와 멸망 받을 자들을 지적한다(9~12). 연결되는 내용이지만 v6~12 편의상 나눠서 상고한다.



Ⅰ. 쉬 흔들리지 말라(1~2)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로 기본적인 재림의 문제를 다루었음에도 박해 아래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었고 이런 조금은 먼 신앙적 교훈들이 오히려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서 좀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신앙적 당부가 필요함을 깨닫고 바울은 이러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다시 붓을 들게 되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1) 앞의 1장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칭찬과 격려, 그리고 기도였다면 바울의 말투는 그들의 부족한 이해에 대한 경계를 주려는 교훈으로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경계조차도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입장에서 논조는 강력하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럽다. “형제들아!”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1f) 이러한 표현은 이미 전서4: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감사와 기도의 표현은 끝나고 당부와 권면을 주려는 사도의 권위를 본다. 특히 같은 표현이라도 전서4:1의 표현은 칭찬과 함께 주는 구함과 권면이었다면 여기서는 오히려 책망조의 당부를 주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1b) 여기서는 주님의 재림과 믿음의 사람들의 모임을 함께 다루고 있고 뒤에 연결되는 내용들로 봐서 역시 재림이 1세기에 환란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과제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바울도 주님의 다시 오심이 믿음으로 인한 불이익이나 억울함의 보상이 될 것임을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세상속에서는 어떤 유익도 얻을 수 없고 오로지 신앙 모임에 참여하여 서로 위로하고 또 메시지로도 격려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믿음의 특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른 교훈이 이끄는 모임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혼란과 무질서가 되고 방종이 되는 모임이 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도 쓰인 “강림하심[παρουσία, 임재, 출현, 오심, 강림]”이 현재의 어떤 종파에서는 이미 주님께서 이 땅에 임하셨다는 잘못된 이해로 믿음을 그르치고 있는 부류들이 있다. 저들의 가르침은 παρουσία를 단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임재 해 계시는 것으로만 이해한 것인데(παρουσία가 NT에 모두 24회 바울서신에 20회 데살로니가전후서에 7회) 그들의 대표적인 주장은 이렇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라는 말씀을 중심한 것인데 마태복음 24장의 내용은 건전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로는 A.D. 70년의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주님의 재림을 함께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NT에 주님의 다시 오심은 “παρουσία” 한 단어만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또 다른 재림의 표현을 대표적으로 하나만 꼽으면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ἀποκάλυψις, 드러남, 계시, 나타남] 때에”(1:7b) 라는 표현이다. 결국 단어가 가지는 단편적인 이해는 늘 문제를 만들 수 있는데 앞의 마태복음 24:3의 내용도 문장 자체만 봐도 앞으로 있어질 일들에 대한 진행형을 말하고 사건들의 전조로 이해할 수 있는데 지나친 이해는 마치 어떤 사건을 정지된 상태로만 이해하는 것이 문제이다. 언제나 말씀의 이해는 계시하시는 전반적이고 통일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관련된 이론이나 가르침에 대해 함께 거론되는 내용으로 여기에 쓰여진 “모임[ἐπισυναγωγή, = ἐπί, ~에, ~에서 + συνάγω, 모으다]”이 NT에 이곳과 히브리서10:25 단 두곳에만 사용된 단어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한 것처럼 역시 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련되고 있다. 같은 낱말이지만 동사형으로 쓰여진 것도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ἐπισυνάγω]”(마24:31) 하여 역시 우리 주님의 재림 때에 그 앞에 선택된 사람들을 모으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두가지에 관련하여 “관하여”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의 재림과 모임에 관한 논의나 이론이 많았던 것 같고 그러한 것들이 보다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논의가 되기를 기대하는 사도로서의 소망으로 요청하고 있다.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2f) 거론되는 세가지의 통로는 물론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예언의 통로를 말하고 있다. 앞의 살전5:19~20의 부정적인 형태의 당부를 준 바 있지만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며” 예언의 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재림에 대해 말하는 부류를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이다. 또는 바울을 비롯한 다른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 두번째이고 편지는 앞의 데살로니가전서를 비롯한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것으로 바울 일행에게서 받은 편지들에서 말했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내용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2b)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성급한 판단을 하는 부류들이 데살로니가의 교우들 중에 있었던 것 같은데 비슷한 경계는 디모데후서2: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는 내용과 같은 것이다.

아직 있지도 않은 일을 지레짐작으로 판단하는 것은 적어도 신앙에 있어서는 옳지 않은 자세로 역시 경계해야 할 내용이다. 이런 온전치 못한 정보를 듣고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는 자세는 전후 좌우를 모두 살피고 바르게 판단해야 하는 것은 비단 믿음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원의 운명을 좌우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단지 풍문으로 들은 것으로 흥분하여 자제력을 잃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밤중에 갈릴릴 바다위에 풍랑으로 고생하는 제자들을 구해 주시려고 바다위로 걸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령이라고 두려워 소리지르는 제자들의 모습(마14:24~26)과 다름 없는 모습이다.

잘못된 신앙적 정보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계했던 것처럼 자신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마음에 두고 차분하고 심중한 자세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요한계시록을 풀어 증거한다는 것으로 그 이해가 바른 것인지 아닌 지도 살피지 않고 함부로 그들을 따르는 것은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안타까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것 역시 주님의 다시 오심의 전조증세라고 볼 수 있다.



Ⅱ.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3~4)

바로 앞에서 경계했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2b)는 내용을 확인하고 주님의 다시 오시기 전에 있게 될 경계해야만 할 시나리오를 순서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주님의 재림 전에는 반드시 잘못된 미혹이 있을 것을 경고하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다음 시간에 더 깊이 생각하게 되겠지만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는 안타까운 경계로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한 일련의 구원 속에서의 역사임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른 쪽에서의 표현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3) 사람관계의 서로의 믿음을 배반하는 일도 지탄받아 마땅한데 건전한 신앙적 복음을 배반하는 행위야 말로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책망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을 우리 나라나 주변에서조차 더러 보는 일들이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이들의 나중은 반드시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 받을 것에 대한 확인을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준 바 있다.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5) 현 혼란한 세상에서 바른 진리대로 신앙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또 진리대로 신앙하는 것은 때로 불이익을 당하고 고독할 수도 있다.

이제 재림 전에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의 나타남의 진행을 보면 먼저는 그렇기 때문에 먼저 경계를 주는 내용이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3f)는 당부이다. 여기 “미혹되다[ἐξαπατάω]”는 철저하게 속이는 것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이런 속임을 당하는 일은 피해야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도 진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자신의 재림 이전에 이런 일들이 있게 될 것을 예언하신 바 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마24:10~11)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3fm) “배교하다[ἀποστασία, 변절, 배반]” NT에 이곳과 행21:21에 단 2번 나타나는 단어로 본래 OT의 LXX에서는 율법을 버리고 이방종교인이 되는 경우에 사용되는 표현이었다고 하는데 본래는 정치적, 군사적인 반란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데서 조금은 무자비한 행동의 표현이다. 우리는 대개 배반하는 사람들을 두고 ‘어떻게 저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앙안에서도 이런 배반은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도 마지막 때에 있어질 것이라는 데서 더 심각하다.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mb) 여기 불법의 사람이나 멸망의 아들을 동일한 같은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다. 독특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또 다른 표현으로 쓰인 “ἀποκαλύπτω”를 여기서는 불법과 멸망의 아들의 나타남에 사용하고 있는 것인데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 아니라 감춰져 있듯이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의 때에 갑자기 나타나는 저들의 처세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성격을 먼저 말하고 그런 사람의 결과를 이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건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갖지 못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이치를 왜곡시키고 스스로 만든 법을 하나님의 법인 것처럼 처신하는 사람으로 이러한 사람들의 운명은 당연히 정해져 있는 대로 멸망의 아들이다. 우리 주님께서 가룟 유다를 두고 이런 표현을 사용하심을 본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12b)

사도 요한은 이런 사람을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이런 존재들이 마지막 주님 오시기 전에는 많을 것이라고까지 증언한다. “…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2:18)

이 v3의 마지막은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3b)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는 메시지는 거론된 이런 일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4) 앞에서 지적한 불법의 사람으로 멸망의 아들의 처신을 이르는 표현인데 한마디로 자신을 至高至善의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내용이다. 첫번째의 [대적하는 자]는 ‘반대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이다.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모든 인류가 종교심을 가지고 찾는 신으로 이름 붙여진 대상을 의미하는 표현이라면 “숭배함을 받는 것”은 모든 섬김을 받고 있는 대상을 말하는 것으로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도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17:23) 일반적인 종교심의 대상을 통틀어 하는 말이다.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4b) 모든 일컬어지는 신들이나 하나님위에 자기를 두고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교만에 이르게 되는데 이 말세지말이라고 하는 시대에 이런 일들은 우리 대한민국 속에서도 흔한 일이 되고 있다. 자신을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나 예언된 메시아라고 내세우는 것은 흔한 일이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 단 2구절을 가지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조차 불완전한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떠난 여자를 ‘어머니 하나님’으로 만들어 섬기고 있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짐도 주님의 재림의 전조로 밖에는 볼 수 없다.

독특한 것은 자기를 “높이다[ὑπεραίρομαι, 스스로 높이다, 의기양양하다, 오만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신 바 없는 신앙에서 가장 치명적인 교만의 절정이고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다[ἀποδείκνυμι, 증명하다, 나타내다, 임명하다, 알리다, 지적하다, 선언하다]”라는 표현은 요즘 흔한 데모(demonstration)하는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것임을 보게 된다.

이 역사의 마지막에 주님께서 죄와 상관없이 반드시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오시겠지만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사건들이 반드시 있고 나서야 다시 오신다는 경계를 들으면서 이런 현상이 빈번한 이 무질서의 마지막 역사를 보면서 더욱 경성하는 신앙적 자세를 가져야 할 것 같다.



Ⅲ.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5)

이 마지막 경계는 바로 다음 v6에 연결되고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전하는 악한 세력을 막는 자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주고 있지만 그 막는 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하기 어렵고 다만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악한 세력들을 형벌하시고 영광을 나타내실 것에 대한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 각자의 경성을 다시한번 당부하는 경고의 메시지 같은 것이다. 일단 이 부분의 공동번역 본이 이해를 더 쉽게 하는 것으로 소개하면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이런 일에 관해서 누차 일러 둔 일이 있는데 여러분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라고 번역을 하여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부터 계속 주지시켜온 사실임을 확인하고 있다.

어쩌면 이 부분은 저들의 무지를 깨우치는 투의 책망의 내용이지만 역시 진지하고 냉정을 잃지 않은 자세를 볼 수 있다.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내용은 어느 정도 신앙을 해 온 사람들은 수없이 들어온 신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또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대하고 바라는 구원의 완성과 사랑의 역사라고 할 것이다. 또 이 다시 오심과 더불어 항상 붙어 다니는 내용이 이 재림전에 있게 될 미혹의 내용들이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마24:11)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23~24)

다음 시간에 보겠지만 이러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렇게 급해서 건전치 못한 신앙과 거짓 메시아에 속하 넘어간 많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자신들의 비극적 운명을 예측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자신들의 믿음을 자랑하는 안타까움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불변하는 진리 되신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마지막이 오던 우리 각자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가던 죄에서 구원받는데 전혀 혼란을 느끼지 않을 분명한 생명의 이치를 주셨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경계를 받을 때마다 더욱 경성하고 깨어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는데 부족됨이 없는 경건으로 사는 복된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름 편에서는 우리가 비록 저주를 당해도 그것은 온전히 우리 각자의 책임이다.

마지막 시대가 가까울수록 영적세계는 더 혼란하고 우리 주님의 말씀처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막13:22; 마24:24)는 경계는 현실이 되어 간다. 주님의 약속된 재림 앞에 흔들리거나 두려움 없이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재림 전에 진리를 배반하는 일이 있고 나서야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고 온 갓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이려는 데모를 해 댈 것이므로 더욱 경성하여 그런 멸망 받을 일들에 휩쓸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은 바울 사도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에 경계되고 있는 만큼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경건의 삶을 사는 것만이 하나님의 보호의 능력을 입을 수 있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