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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요 4:46-54 2002-11-10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는 그 사람과의 친분의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 하는 것 역시 관계의 긴밀성에 차이를 가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은 보다 깊은 관계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많은 종류의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지만 그러한 주변적인 것들은 핵심이 아니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이적의 내용은 예수 자신이 신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가장 큰 표적일 것이고 이 땅에 숨쉬셨던 모습조차가 경이로 가득찬 표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불신의 눈으로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마리아의 몸에 잉태에서 베들레헴의 탄생 나사렛에서의 삶 모두가 사실 감추어진 표적이었던 것이다.

Ⅰ.누구에게나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일들은 있다.(46~47)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1.세상의 좋다고 하는 것들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①왕의 신하라는 권세와 그가 가진 재물은 죽어 가는 아들 앞에 아무 쓸데가 없었다. 이 사람은 당시의 세도에서 왕의 권세를 등에 업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파서 신음하는 사랑하는 아들 앞에서 아무 힘도 끼칠 수 없음을 깨닫는다.

②당시의 의술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무용지물이었다. 기록에는 없지만 그는 그의 권세에 걸맞게 의사를 부르는 것도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효험이 없었기 때문에 34Km의 거리를 단숨에 내달아 아직도 확실치 않은 갈릴리의 선지자를 찾았을 것이다.

③세상의 신뢰하는 모든 것들이 극단적인 순간에는 백해무익(百害無益)이 될 것이다. 이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좋아하고 가지려하는 권세, 물질, 보석, 영광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마지막 주님의 다시 오심의 때에도 역시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만을 인생의 가치로 알고 그런 것에만 관심을 두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 임하실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눅23:30) 요한 사도는 주님의 재림의 때에 관하여 기록하기를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6:15~16)

2.절박한 고백을 듣게 된다.(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①자기 신분도 벗어 던지고 ②단 숨에 먼길을 달려가서 ③애걸하였다.

누구나 신분을 망각할 정도의 위기는 다 있다. 복이라면 그의 겸손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 가는 마당에 최면이고 위신이고 내세울 입장이 아니었다.

Ⅱ.하나님의 은혜 받기에 너무나 무딘 것이 사람이다.(48~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1.사람들은 끊임없이 기적만을 보고자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 신, 불신간에 모든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눅11:29) 라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기적만이 사람을 살리는 가장 완벽한 기적임을 증거 하셨다. 바울 사도도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고 증거하고 있다.

2.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고 계산한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

①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나님께는 육체적 죽음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도 불러내신 주님이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20:38)

②내려오소서… 직접 옆에 오셔서 손을 잡아 주고 머리에 손을 얹어서 기도해야 낳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은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8:8) 우리는 기도하되 주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 어떤 경우 오히려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은혜를 제한할 수 있음을 믿고 기꺼이 주님께 우리의 문제를 맡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Ⅲ.주님의 말씀만이 권세가 있다.(50~52)

(50)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1.주님께는 왕진이 필요치 않았다.

①왕진 가방이 필요치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병에 의원이지만 의약품도 의료도구도 필요치 않으시다. 단순히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말씀 한마디로 족하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태초에 천지의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고장난 사람을 고치는 것이야 문제 거리가 되지 않으신다. 바울 사도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 말씀하고 있다.

②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네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거리가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는 거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신다. 갈릴리호수에서 서쪽 내륙에 위치한 가나와 갈릴리 북단의 호수(湖水)변에 위치한 가버나움은 34Km의 간격이 있다. 그러나 이 우주 가운데 충만히 계신 주님께는 거리는 더 이상 제약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2.귀한 말씀과 함께 믿음이 은혜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b)

①그 사람의 요청대로 되지 않았다. 그 사람이 기도한 것은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그러나 나사로의 때와 같이 주님은 그 곳에 오시지 않았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절망하고 낙담해 버린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보다 비교될 수 없으리 만큼 지혜로운 분임을 확신한다면 이 왕의 신하처럼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②자신이 기대하는 응답이 아니었지만 믿고 순종함으로 은혜의 역사는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 이것은 마치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정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순종으로 준비하는 마리아의 믿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2:5)

우리의 기대가 어떠하든지 거기에 반응하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세가 은혜 받을 자세인 것이다.

Ⅳ.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믿음을 준다.(53~54)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이 왕의 신하의 절대적 위기는 오히려 절대적인 복의 기회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위기를 이 사람과 같이만 소화한다면 얼마나 복될까? 사실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절망과 위기는 주님을 만날 기회요, 믿음을 요청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인 샘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위기는 단순한 저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럼으로 위기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부르심이요 역시 은혜 받을 때임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이 왕의 신하는 그 이적의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이적을 통하여 주님을 강하게 인식한다.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53)

1.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헤아리는 믿음이다.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살면서 하나님이 베푸신 그 수많은 이적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주님의 역사가 하나의 기적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구원의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소화할 수 있는 믿음이다. 십자가에 피 흘리신 희생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역사였다는 것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행복 자들이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오늘도 내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릴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2.하나님의 은혜에 가족을 동참시켰다.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바울 사도는 일찍이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고 빌립보 간수에게 증거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 하니라”(32~34)

가족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집단으로 어떤 사람은 그 가족에게 고통만을 끼치는 사람이 있고 기쁨을 위해서 힘쓰는 사람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귀중한 십자가의 은혜를 함께 누린다는 사실이 귀중한 것이다. 지상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는 가족은 참으로 귀중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주님께서는 밤낮 무덤 사이에 거처하던 거라사의 군대 귀신 집혔던 자를 낫게 하신 후에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눅8:38~39)

Ⅴ.결론.

예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두 번째 표적을 볼 수 있다. 그로 인하여 그의 온 집안이 다 믿게 되었다.

첫 번째 표적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으로 그의 자연계에 대한 절대 지배를 나타내 보이셨고 이제 두 번째 표적으로 지역상의 거리가 그의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심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셨다.

왕의 신하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부와 영광을 누리고 살았을 터인데 자신의 아들의 질병의 회복이 불가능함을 보면서 부근 갈릴리에서 배척받는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아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요한복음 4:47m)라고 자신의 신분을 벗어버린 채로 간청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피조물인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우리의 삶 속에 완전하신 절대적 존재의 힘이 필요함을 절감케 된다.

인간의 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할 절박한 시기임을 각성케 한다. 오직 예수께 나아오는 일만이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적 열쇠가 됨을 알아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하다.

종국에 가서는 "자기와 온 집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었다(요한복음 4:53b 참조)는 결론을 보면서 어떤 대상에 국한하지 않는 인류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보게 된다. 구약의 마당에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라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됐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이 온 인류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즉 온 인류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이심을 인식하면서 여기에도 인간 측에서의 고백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 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려니"라는 소리 없는 고백이 기적을 낳게 했고 이것은 그 아들 곁에 임재해 계시는 분으로 믿은 모습인 것이다. 주님께서 은혜와 기적을 베푸시는데 거리와 질병의 경중이나 문제의 종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확신하는 나와 여러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