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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계 3:14~22 2003-02-02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우리는 그 동안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하여 우리 교회와 자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점검해 왔다. 마지막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각자가 또 우리 교회가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변화를 받았으면 한다.

‘라오디게아’는 BC 3세기에 안티오커스 2세인 수리아 왕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 그의 왕비인 [Laodike - laos(백성)+ dike(공의, 정의)=백성의 정의]의 이름을 따라 이름 붙여진 도시로 AD 60년에는 지진으로 파괴되었을 때도 황제의 원조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다시 회복할 만큼 부요한 도시로 무역의 요충지로 금융업이 일찍이 발달하여 큰 은행들이 있었고 양모로 짠 고급 모직의 생산이 활발했고 제약업과 당시에 유명한 의학교가 있어서 특히 안약이 유명한 곳이다.

바울의 편지들 중에서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서신은 골로새서에 집중되고 있다.(골2:1, 4:13, 15~16) 이것은 지형적으로 우측 가까이에 골로새 교회가 있고 ‘히에라볼리’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이 라오디게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골로새 교회가 많이 수고하는 것을 듣게 된다.(4:13)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와 골로새 교회는 바울의 편지를 회람 형식으로 돌아가면서 읽었고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비록 없어지기는 했어도 보낸 편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4:16)

이 교회는 다른 교회들처럼 안에서 발생한 이단적인 요소나 부도덕한 일들이 없었을 뿐 아니라 밖으로부터의 박해도 없었고 오히려 부유하여 모자람이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은 취미정도로, 교회를 자신들을 과시하는 사교장 정도로 생각하여 편하고 적당하게 믿는 세상과 교회를 적당히 오가는 정도였는데 성경학자들은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오늘날 교회의 그림자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입장의 사람들에게 신앙은 하나의 걸치는 사회적 지위의 옷 정도로 생각하면서 천국이 있으면 가고 없어도 무방한, 별로 내세에 대한 기대나 소망이 없기 때문에 목숨 바쳐 주님을 따를 이유도 없다.

믿는 자라는 이름은 있지만 여차하면 세상과 다름이 없는 변화무쌍한 신앙의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주님의 모습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14)로 나타나신다. 아멘은 “진실로, 믿을 수 있는”의 뜻이고 “충성”이나 “참된 증인”은 모든 의미가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 자체가 결코 변해서는 안 되는 성격의 것임에도, 세상의 흐름에 적당히 보조를 맞추며 신앙과 세상의 가치를 같이 생각해서 카멜레온처럼 자주 변하는 믿음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이해시키시기 위하여 주님은 이렇게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또 세례를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던 사람들이 세상에 다시 되돌아가는 안타까움을 알게 하시려고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을 선언하신다.

언제나 처럼 신앙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생명력을 발하고 무사하고 안일한 가운데서는 무기력한 모습은 1세기에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는 부르짖고 매달리지만 모든 것이 잘되고 무사할 때는 편하고 가벼운 대로 흐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주님은 야고보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2:5)

더 심각한 문제는 육신적 평안과 부요가 영적인 삶의 기준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나 오늘 우리의 병폐이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19)는 비유로 말씀하신 주님은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오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바로 진단하게 하여 우리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에 세우고자 오늘 이 말씀을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에 주고 계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일찍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거나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고 지적하고 있다. 무사하고 편안할 때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질까 경계하는 자세가 언제나 우리 각자에게 있어야 한다.

Ⅰ.예수께서 보시는 저들의 영적인 상태는 역겨운 모습이었다.(15~17)

이 교회도 사데 교회와 같이 칭찬은 없고, 책망만 듣는 교회였다. 교회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주님께서 입혀 주신 성결과 아름다움을 완전한 혼인 예식이 있을 때까지 지키고 간직하여야 한다.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속히 오시겠다고 선언하시고 승천하신 일세기인데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시기에 거의 벌거벗은 상태의 보기에도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1.주님께서 아시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용납하시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앞의 교회들을 향하여 [에베소]“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 [서머나]“믿음으로 인한 환난과 궁핍을 안다”, [두아디라]“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 [필라델피아]“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것을 안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15f) 라고 우유 부단한 믿음의 상태를 안다고 지적하신다. 오늘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 하실까 두렵다. 믿음을 아주 갖지 않아 교회를 나오지 않는 불신자도 아니고, 적극적인 믿음의 모습도 아닌 주님께서 보실 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야고보를 통하여 말씀하신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2:19~20)는 한탄과 같은 표현이다.

토할 수밖에 없는 역겨운 모습이었다.(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자기 만족에 붙잡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당시 이 도시에서 나는 온천물처럼 목욕수로 쓰기 위해서는 불로 데워야하고, 마시기에는 역겨운 냄새만 나는 미지근한 온천 수 같은 신앙이라고 평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저들을 불쌍히 보시고 권면 하셨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b) 아예 적극적으로 불신자들처럼 세상의 향락을 위하여 믿음생활을 하지 말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 생활을 뜨겁게 하든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모습은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합당치 않은 모습니다. 그렇다고 믿음을 버리라는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2.저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잘못 알고 있었다.(17)

(1)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모습은 자랑스럽기만 하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f)

(2)그러나 주님께서 보시는 저들의 상태는 불쌍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b)

(3)하나님 앞에 오늘 나 자신은 과연 떳떳한가?

Ⅱ.주님께서 저들을 살리시기 위한 사랑의 권면이 있다.(18~20)

1.훈련된 믿음을 가지라고 권하신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18f) 믿음은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다듬어지고 순수해 지지만 그런 것이 없을 때 억지로 단련하는 방법이 바로 훈련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증거 해 준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평안하고 고요할 때도 훈련으로 단련하는 믿음이 어려움에 닥쳐도 넘어지지 않는다.

2.흰옷을 입으라고 권면 하신다.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18m) 벌거벗은 영적인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수풀 속에 숨은 아담과 같다. 그러한 아담의 수치를 가려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에덴에서 내어 보내셨고 죄로 인하여 수치스러운 인류와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 죽음에 동참하여 세례를 받는 사람들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혀 주신다.[“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세상에 붙잡혀 사는 많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광스러운 의의 옷인 그리스도를 벗은 모습처럼 수치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주님께서는 신앙의 사람들을 향하여 의의 흰옷인 그리스도를 견고하게 입으라고 당부하신다. 오늘 나는 하나님 앞과 세상 앞에 영원한 흰옷이신 그리스도를 입고 사는가? 이 흰옷을 입은 자들만이 마지막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 설 수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계7:9) 요한은 다시 당부하기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라고 권면한다.

3.영적인 눈을 뜨라고 격려하신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b)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1:18)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의 유행이나 좋아하는 것들은 못 봐도 되지만 시대의 징조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마16:3) 우리사람들은 언제나 양면에서 다 완전하질 못하다. 세상의 것을 잘 보는 사람은 영적인 눈이 어둡고 영적인 눈이 밝은 사람은 세상의 눈에는 민감치 못함을 본다. 세상의 돈버는 눈은 밝으나 자신의 영적인 수치를 보지 못하는 눈은 하나님 앞에서는 비극이다.

주님께서는 사랑[phileo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지만 때로는 친구와 같은 사랑으로 권면하신다.]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19f)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3:12) 그렇기 때문에 채찍 자체가 사랑에서 드는 것이다.

4.영적인 데 열심을 가지도록 회개하라!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b)

사랑이나 신앙은 등한하면 점점 식는다. 그러나 세상에 잘 어울리는 그런 상태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영적인 열심을 낼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요청 앞에 내가 세상의 것도 떠나지 않으면서 신앙에 열심을 내겠노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고백일 뿐이다. 세례 요한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마3:8) 요청한다. ‘회개’는 어떤 절망의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Ⅲ.주님은 온전치 못한 나(우리)를 계속해서 권하신다.(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1.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두드리신다.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두드리신다. 십자가에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주님은 나의 마음문을 두드리신다. 325:2“문 두드리는 손은 못 박힌 손이요, 또 가시 면류관은 그 이마 둘렸네, 3주 예수 간곡하게 권하는 말씀이, 네 죄로 죽은 나를 너 박대할소냐…”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했는데 ‘서서’는 현재 완료형으로 과거 어느 때에 시작하여 계속 되다가 이제는 완료된 헬라어 시제이고 ‘두드리노니’는 현재형으로 지금도 계속 되는 것을 뜻하는 형태이다. 지금 까지도 두드림은 계속 되고 있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다행히도 우리에게 기회이다.

2.열기만 하면 놀라운 은혜와 영광이 보장 될 것이다.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하반절의 시제가 의미하는 바도 역시 깊은 뜻을 가진다.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은 언제든지 듣고 한번 문을 열므로 계속적으로 효력이 발생하는 의미이고(부정과거 가정법)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아직도 미래에 속한 형태를 의미한다(미래형).

3.언젠가는 두드리시기를 중단하시는 때가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시고 지금도 기다리신다. OT 아가서에 보면 “…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5:2) 주님은 계속 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반드시 그만 둘 때가 있을 것이고 그 후가 된다면 늦은 것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오래 기다리셔도 응답치 않으니 비극일 수밖에 없고 짝사랑이 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기다리심 참 사랑이로다, 문 굳게 닫아두니 한없는 내 죄라”(325:2b) 어느 때까지 주님을 밖에 세워 두시겠는가?

Ⅳ.말씀을 순종하여 회개하고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있다.(20~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위에’가 아닌 ‘안에’ 라는 특징도 있다.)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 같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자긍심이나 육신적 삶은 존경과 안정을 받고 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감겨 있었다. 우리가 세상의 온 갓 쾌락을 즐기며 성경을 읽은 지혜로 사람들 사이에서 능수능란 한 카멜레온 같이 생활하면서 모든 수완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치부하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믿음 때문에 주신 복이라고 착각하고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f) 하면서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교회에는 주일날 하루 예배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할 바를 다하고 있다고 자위한다면 주님께서 보실 때는 가련한 눈먼 자요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행여 우리가 세상적이고 육신 적인 것에만 너무 밝아서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해 버린다면 그야 말로 비극 중에 비극이 될 것이다.

마22:11~13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오늘 외형적으로는 모든 것이 갖추어졌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보혈이 없고, 충성과 사랑이 메말라 약한 자들이 소외를 당하는 교회, 나 자신의 편리에 따라서 적당히 믿음 생활하는 영적으로 가난한 교인, 다 주님의 오심이 가까운 이 시기에 돌이켜야 할 모습들이다.

주님은 행한 대로 보응 하시는 참된 증인이시다. 오늘 우리 각자의 믿음 생활을 확인하고 지금까지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살았다면 지금도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죄로 절망하는 인생들에게 진정한 부요와 행복을 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다시 모셔서 주님 오실 때에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지 않도록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을 힘입는 나와 여러분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