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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5:1~9 2005-06-05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만나 어찌할 줄 모르고 걱정하고 두려워 할 때 우리들의 불성실과 믿음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우리 곁에 서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며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주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를 일이다. 그 사랑과 권위 앞에 우리 모두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한 주님이시지만 그러한 긍휼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가장 성경을 잘 안다고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부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고, 오늘 우리가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본문 1~20절까지의 내용은 마가복음7:1~23에 함께 기록하고 있지만 공관 복음인 누가복음은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주님의 또 다른 표적을 언급하기 전에 어쩌면 그 표적보다 중요한 말씀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기록하는 마태나 마가의 기록에 경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내용의 중요성과 함께 이 부분을 두 번에 나눠서 상고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고 좋아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그렇다. 주님은 제사나 예배 보다도 말씀하신 것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우리는 입으로는 쉽게 말씀에 순종이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 적은 부분에서 조차도 순종치 못하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범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가지고 살아야 할 가나안을 들어가려고 하는 마당인 요단강 건너편에서 율법을 정리하고 확인하는 신명기에서 이를 강하게 경계하셨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4:1~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12:32)

그런가 하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로 구속을 완성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시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이를 강하게 경계하고 계신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다른 것을 섞는 것 만큼이나 오만방자 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그대로 지키기만 하면 생명 얻을 말씀을 인간의 생각과 편리를 뒤섞어 단순한 생활의 교훈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해 온 것이 사실이고 오늘 우리 또한 이런 경계를 가져야만 한다. 살고 죽이는 법이요 기준이라면 그것을 못쓰게 만드는 것보다 큰 죄는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듣기 좋은 설교요 기분 좋게 말씀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면 그 모든 말씀이 나에게 아무 이득이 없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한다면 성경에 약속한 모든 것은 그 말씀을 순종하는 자의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두려운 경계를 우리에게 교훈 해 주고 계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加減) 없이 듣고 그대로 순종하여 성경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허락된 은혜를 충만이 받아 누리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 …



Ⅰ.인간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귀하게 다루는 모순이 있다.(1~2)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갈릴리에까지 파견된 대표단은 감히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적으로 항의하지 못하고 제자들을 걸어서 꼬투리를 잡고 나온다. 제자들의 일반적인 생활방식을 거슬리는 행동은 사실 주님의 가르침 때문임을 분명히 알 것임에도 제자들을 책잡고 나서는 것은 이들의 자세 자체가 당당하지 못한 것이고 어찌 보면 비겁하기 까지 한 행동이다. 그들의 항의는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2) 유대인들은 모세의 오경이나 선지서와 시편, 그리고 歷史書를 신앙의 규범으로 삼고 생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탈무드나 미쉬나 같은 규범들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은 예로부터 구전(口傳)으로 전승되어 오던 것을 랍비들이 책으로 기록하여 토라라는 율법 못지 않게 생활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교훈들이었다. 요즈음에도 탈무드는 교육교재로서도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조차 대단히 인기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남미의 유명한 저술가인 레오 버스까글리아 같은 사람은 종교인은 아니었어도 이러한 부모들의 교훈들이 그의 삶과 저술 활동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책들에서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대단히 위생관념이 강했고 이것은 구약의 율법의 부분이기도 하다. 율법에서 금지된 부정한 식물들은 사실 당시의 환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단히 위생적인 부분들을 다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문의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7:3~4)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분명히 위생적으로는 옳다. 위생적이지 못한 생활은 질병을 일으키고 결국 괴로움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종교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오늘 날에도 생명의 법이 되지 못하는 대부분의 종교들은 사실상 문화와 제사예식이 굳어지고 정리되어서 종교적 법전을 만든 것들이 많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종교적으로 정죄하고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신앙의 체계라는 교회 헌법을 만들어서 그것이 성경을 어기는 모순들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헌법이나 장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부분은 회개해야 할 부분이다.



Ⅱ.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신다.(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여기서 주님은 유대인들의 항의를 들어 그들이 지적하는 인간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을 비교하시면서 오히려 그들이 인간의 유전으로 주님의 생명의 법을 범하고 있다는 책망을 하고 계신다.

[“유전” 헬,(파라도시스, paradosis)←헬, (파라디도미, paradidomi)옆으로 던지다, 넘겨주다] – [“계명” 헬, 엔톨레(entole) 명령, 즉 권위 있는 규정, 계명, 계율, ← 헬, 엔텔로마이(entellomai) 명령하다, 위임하다, 명하다]; [“범하다” 헬,파라바이노(parabaino) -(파라, para-옆으로,옆에) + (바이노, baino -걷다, 가다)=지나치다, 벗어나다, 범하다, 위반하다, 버리다 등등]

많은 경우 교회의 교파들이 헌법과 교리 장정을 만드는 이유는 성경이 실재적으로 적용하는데 난점이 있다고 하는 이유에서이다. 그리나 그러한 교리 장정이 만들어져야 할 만큼 성경이 어렵고 불안전한 책이라면 성경의 절대무오(絶對無吳) 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증거 한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5m~17)

오늘도 보다 합리적인 인간의 생각이 하님의 말씀에 앞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버리는 것이 되고 주님의 말씀을 지나치는 것이 되고 만다. 주님은 요한 사도를 통해 경계하신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1:9)

바울 사도를 통해서도 같은 경계를 주신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4:6)



Ⅲ.하나님은 절대로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 까지 요구하시는 독선적인 분이 아니다.(4~6)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유대인들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신다. 율법과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 다음으로 인간 관계 속에서 공경해야 할 대상을 부모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복음 시대에도 불변하는 원칙이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훈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①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이중적이거나 모순될 수 없다는 말씀으로 절대로 여기서 이 말씀을 저기서는 저 말씀을 이중적으로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인데 실재로 주님은 이중적인 것을 가장 싫어 하신다. 그래서 바로 다음 말씀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주님을 바로 경외하는 사람은 절대로 이중적이지 않다고 가르치신다.

②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에게 가야 할 것까지 욕심 내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비록 주님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10:37) 라고 하셨지만 이 말씀은 그러한 말씀과 절대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 말씀의 내용은 아버지나 어머니께 ‘생활비를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연보로 바쳐버렸으므로 이 달에는 생활비를 못 드리겠습니다.’ 라는 내용인데, 사실 그렇게 할 때 믿음이 없거나 연약한 신앙의 부모는 자식도 자식이려니와 자신들에게로 와야 할 것을 가로채는 것 같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삶의 자세는 뒤에서 지적하겠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계명을 폐하는 무서운 행동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그렇게 모순되지 않다.



Ⅳ.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쳐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7~9)

(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가장 결정적인 지적을 하신다. 구약 이사야서 1장에서는 하나님께 제사는 드리면서도 삶은 전혀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에 대해 무서운 책망을 주고 계시다.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의 제사에 대해 지적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1:11~14) 하셨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같은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동일한 책망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제사자들을 향하여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는 탄식을 하시는 것을 주님께서 인용하고 게시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말, 그것은 아부일 뿐이고 사람일지라도 그런 동정이나 칭찬은 기뻐하지 않을 것인데도 잘못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향하여 이런 두려운 예배를 생각 없이 행할 수 있다는 경계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경계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이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9) 이 말을 좀더 오늘의 우리 표현으로 가까이 가져오면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공동], “… 자기들에게 편리한 대로 생각해 내어 만든 규정에 따라서만 나를 높이고 섬기기 때문이다”[현대어], “사람이 만든 법을 마치 내 교훈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나를 헛되이 예배하고 있다”[현대인]

사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되어서는 안된다.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개인의 가족관계에서 신앙의 이유로 부모나 자녀에게 소홀하거나 믿음을 핑계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주님의 구체적인 경계를 듣는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바리새인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인간 편의 주의로 가감하여 신앙하는 교회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편의주위에 예식과 의미를 분리하여 이해하는 것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서 후회를 면치 못할 것이다.

종교의 헛된 계율에 매어 신음하던 중세의 카톨릭에서 반대자라는 “프로테스탄트” 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개혁을 이루었지만 다시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카톨릭만도 못한 부분마저 있다. 모든 종교 개혁가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으로 신앙을 신약성경의 명령으로 대로 회복해야 한다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의 모습들은 그러한 선구자들의 외침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것이 말씀을 순종하는 것인가?

예배는 주님의 희생을 기념하라는 명령을 예수께서 직접 간곡한 부탁으로 주셨고 사도들이나 신약 교회들 뿐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도 한결같이 동의하는 것이지만 오늘의 교회들은 ‘경건성이 약화된다’거나 번거로움을 핑계로 매주 행하지 않는 것은 회복된 예배라고 할 수 없으며, 모든 교회가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성경에 있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장례에 하나가 되고 부활에 일치가 되는 죽고 사는 모습인 세례를 많은 물에서 행했다면 적어도 [침례교회]라는 교파는 생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사도행전 속의 구원 받은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즉각 적으로 행했던 세례를 1년 후에 행하는 것도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최후 명령을 분명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분명히 세례가 먼저 이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 후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고백만 확실하다면 세례는 줘야 한다.(행2:38, 8:37)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성경적인 약속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8)라는 지적처럼 마음과 행동이 각자인 것은 칭찬 받을 믿음이 아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신 후에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들임에도 아직도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마23:2) 있는 종교 계급 주의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빌3:18) 이런 모든 것은 다음 주에 이 말씀의 나지 부분에서 상고하게 되겠지만 간악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정욕으로 인한 것이지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바른 진리를 깨닫는 대로 즉시 회개할 의무를 가진다. 그렇지 못한다면 나중 심판대 앞에서 땅을 치며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다.

비록 무거운 말씀이지만 말씀에서의 위로는 죄악 된 세상이지만 의를 행하고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가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이 확신과 생명 되시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