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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5:21~28 2005-06-19
네 믿음이 크도다…!  
주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와 대항을 잠시 뒤로 하고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셔서 마가복음에 병행되는 기록대로는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한 것으로 봐서 주변에 알리시지도 않고 조용히 계시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주님의 명성은 그 곳 이방에까지 알려져서 조용히 계시려던 고요는 깨어지고 마침내는 “숨길 수 없더라”고 연결되는 기록으로 봐서 또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게 되는 것을 본다.

선택되었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언제나 믿음이 적다거나 없다고 책망을 받은 대신 이 유대인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본서에서조차 이방인들의 믿음이 오히려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제자들을 향해서 “…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4:31)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17:20)고 책망하신 반면에 8:5~13에서는 백부장을 향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8:10) 하셨던 주님께서는 외면당하고 무시를 받으면서도 주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아 내는 이 여인을 향해서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라고 극찬을 하고 계심을 듣는다.

막7:24~30에 함께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방 여인의 칭찬은 외면당하고 개 취급을 당한 후라는 데 더 큰 가치가 있다. 이 사건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이며 주님께 대해 은혜 받을 자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크고 많다.

자신의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않았다고 요한 사도가 나중에 증거 하는 것처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1~12)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에 계실 때에도 이스라엘로부터 개 취급 당하는 이방 사람들을 외면치 않으셨음도 확인 되어지는 말씀이다.



Ⅰ.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구세주를 바로 알아 보았다.(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주님을 만날 이유가 되었다면 어떤 고통이나 절망도 복이다. 또 이를 위해서 주님은 이왕에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범죄하고 에덴을 잃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다시 귀한 약속에 불러들이고자 창세전에 이미 계획하셨고, 결국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지만 그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계획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였다. 이것을 몰랐던 이스라엘은 오로지 혈통에 속한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복을 누릴 것이라는 엄청난 착각으로 주님을 잃게 되는 비극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18:18) 또는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4)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이방의 구원에 대한 예언과 기록들이 적지 않다.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4:2)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의 왜곡된 모습이 무엇에게 인가 섬기고자 하는 종교적 모습의 형태로 나타나고 결국 힘겹고 어려우면 자신의 의지하는 신이라 이름하는 것을 향하여 소원을 빌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비는 대상이 기도를 들어 둘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생명이 없는 것들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지만 이 가나안 여인은 기도의 대상을 바로 선택하였다.

특히 이 여인이 부른 “주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것은 이스라엘 속에서조차 메시아의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은 더러 볼 수 있는 내용이다.[“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 “…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마12:23)]

오늘 우리가 복되다고 하는 것도 역시 기도의 대상을 바로 선택했다고 하는 것이 복이다. 바울 사도는 철학의 중심지인 아덴에서 인간의 밝은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행17:29~31)고 증거 한바 있다.

“…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우리는 때로 이 여인처럼 너무 먼 곳에서 목이 터져라 부르짖을 때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복은 그 기도를 들으실 수 있고 응답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름없는 이 여인은 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그녀의 딸이 흉악한 귀신들린 것조차 감사할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 여인도 당시의 일반적인 여인들처럼 주님을 가까이 찾아 모실 수 없었을 것이므로 이 여인의 마음 아픈 비극은 주님을 만나므로 복이 되었다.



Ⅱ.주님의 침묵과 제자들의 귀찮아 함이 심하게 여겨진다.(23~24)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안타까운 처지의 여인은 소리질러 간구하는데 주님은 한 말씀도 대답이 없으시자 제자들 조자 이 귀찮게 여겨지는 장애물을 처리해 달라고 청하고, 여기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홀로 내뱉는 푸념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실 뿐이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왜 옆의 사람들이 시끄러움을 호소할 정도로 이 여인은 부르짖고 주님은 비록 이방 여인이라 할지라도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믿음을 고백하면서 간구를 드리는데 거기에 침묵으로 일관 하실까? 아니 여기 부르짖고 있는 여인이 다름아닌 오늘 나 자신이라면 우리는 어떨까?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부분이요 믿음에 있어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앞에서 이미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백부장의 자녀가 아닌 하인의 중풍도 치료하신 주님 이시라면 고쳐주셔서 안될 이유라도 있는가? 어쩌면 이 긴 침묵은 이 여인의 믿음을 키우고 있는 과정이라고 봐 진다. 만약에 절대로 고치시지 않으실 것이었으면 나중에도 고쳐주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어쩌면 이 여인을 통해서 제자들과 우리를 가르치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마치 누가복음 18:1~8에 나타나는 불의한 재판관과 힘없는 과부의 내용이 연상되기도 한다. 계속 보채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도 않고 불의한 재판관이었지만 자신의 불편 때문에 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는 비유처럼 이 여인의 안타까움은 오늘 우리 각자의 처지로 이해하고 배워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 내용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같은 생각으로 가고 있는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키우려는 인내의 기다림이라는 사랑의 측면이라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라는 제자들의 불평은 마치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19:13)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열왕기하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아들이 죽자 엘리사에게 나아간 여인을 만류하는 게하시와 같은 매서움이 제자들에게는 있었다.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저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왕하4:27)

여기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어찌 보면 제자들의 요청에 함께하는 것 같은 어감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말씀의 깊은 의미는 육신적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 역사 속에 죄로 인하여 잃어진 자를 찾으러 오신 주님의 사명으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말씀이 액면 그대로 육신적 이스라엘 백성만을 표현한 것이라면 역시 주님은 이 이방여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주님은 이 역사 속에 잃어진 양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목자임에 분명하고, 귀찮아 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가고 있다.

주님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고 어려움 당하는 자를 귀찮아 하는 우리 자신들은 아닌지 우리 각자의 내면을 살필 필요가 있다.



Ⅲ.자신의 자존심보다도 주님의 응답을 사모했다.(25~27)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표면적으로 볼 때 주님과 제자들로부터 철저하게 인종차별과 외면을 당하는 것 같은 상황을 겪으면서도 이 여인의 자세는 조금 후퇴하거나 낙심 됨이 없이 오히려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제는 주님 앞에 나와서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는 탄식의 하소연을 드렸지만 주님은 더 심한 표현으로 이 여인을 거절하는 한편 어느 민족에게서나 가장 더럽고 혐오스러운 동물로 비유되는 개 취급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인정하면서 긍휼을 구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 주인의 자녀들의 밑에서 아이들이 먹다가 떨어뜨리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면서도 꼬리를 흔드는 애완견의 모습에 자신을 비유하며 끝까지 긍휼을 구걸하는 이 여인에게서 차라리 처절함을 보게 된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하나님은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신 약속대로 겸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를 확보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절대로 비극을 가진 체로 되돌려 보내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욥기서에서 엘리바스는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욥22:29) 주님께서 맨 아래에까지 낮추시면 이제는 높아질 일만 남은 것이다.

아울러 이 고백은 이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먹이심을 인하여 살아가고 존재한다는 주님을 창조주로서 고백하는 신앙이기도 하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눅12:24)

하나님이 낮추실 때는 발바닥 아래까지 낮추면 하나님께서 높이신다. 우리 인생의 모든 생명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그런 이유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신 주님의 교훈은 순종하면 살 수 있는 실재적인 것이다.

‘하나님 저는 개와 같이 취급 당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셔야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은 손을 드실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는 주님의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는 …



Ⅳ.마침내 기도는 응답되고 주님의 칭찬을 받고 있다.(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주님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시는 인간적으로 듣기에는 너무나 심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자세가 바로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가장 사실적인 자세다. 주님께서 뭐라 하시든 그 평가나 선언을 자신에게 사실적으로 받아드리고 수용하는 자세가 바른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수용과 순종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건 언제이건 옳다는 자세이고 이런 자세에 주님께서 복을 주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고 말씀하신 포도나무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모습에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나의 입장이나 형편과 처지, 입장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옳다!’는 자세이다. 우리는 이를 욥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너무 이기적이고 편협적인 이스라엘의 독선과 우리 자신들의 신앙의 자세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하나님은 옳은 것이며, 내 생명까지 위협을 당하고 나 자신이 짐승취급을 당해도 주님은 옳다!’는 욥과 이 여인 같은 자세가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는 모습이다. 이런 믿음은 바른 믿음이기 때문에 주님은 칭찬하셨고 그의 기도를 응답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우리가 높아져야 하고 영광을 받아야 하고 모든 어려움은 해결 받아야 주님이라고,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입장에서 만들어둔 기준에 갇혀있어서 또 하나의 잘못된 담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선언하시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고 하셨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헤아릴 수 없는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에 기꺼이 그 분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인 것이다.

“나의 처지가 어찌 되든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 라는 철저한 신뢰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로 불행하게 버려 두지 않으신다. 이것은 믿음의 연륜에 관계없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셨을 때도 몇 천년을 하나님을 섬겨온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을 섬긴지 얼마 되지 못하는 본질상 진노의 대상이었고 이방인이었던 이 여인을 비롯한 우리 대한민국의 사람이건 하나님의 권위를 가장 높이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칭찬하시고 상주실 것이다.

모든 인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믿음의 종류가 어떠하든 반드시 그 믿음의 크기대로 응답되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공의시다. 오늘도 처절한 고통과 어려움에 있으면서 주님을 찾는데 아직 응답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을 키우고 계심을 믿고, 지금 나에게 어떤 반응이 오던 변함없이 그리고 온전히 주님을 신뢰한다면 주님은 최종적으로 이 여인에게처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응답을 주실 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