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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5:29~39 2005-06-27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지난 주의 말씀과 오늘 본문과의 연결을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29) 라고 이방지역에 가셧다가 복음선포의 본거지인 갈릴리 주변에 다시 돌아오신 것을 보게 되는데, 마가는 좀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막7:31)

우리는 14:34~36에 비슷한 내용을 이미 읽어본바 있지만 예수께서 움직이시는 곳은 어디나 없이 환자들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그런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의 고난을 주님은 일일이 어루만져 낫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셨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도 여전히 편한 것 보다는 불편하고 힘겨운 인생들이 주님을 더욱 가까이 사실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입장에서 불편은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된다.

주님은 언제나 갈릴리 해변 부근의 호젓한 작은 산 위에서 자연의 사실들을 교재 삼아서 하나님을 전하셨고 이미 산상보훈에서도 이런 모습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을 봤다. 주님을 찾아오는 큰 무리는 언제나 불편을 가진 가련한 영혼들이었고 그들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이셨기 때문에 어떤 불편도 해결 받지 못하는 靈肉의 疾病은 없었다.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31)

주님은 어떤 치료나 이적으로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려 는 시도는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적들과 치료는 주님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 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을 본다. 사실 모든 질병의 치료를 대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다. 이사야는 이를 예언하여 이르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라고 증거 한다.

사실 범죄 하여 만신창이가 된 우리 인간들을 표현하기를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6) 라고 묘사하고 있다. 아무리 잘 나간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을 가만히 들여다 봐도 성한 곳이 없이 새로운 상처뿐인 영혼과 마음과 육신, 그래서 주님이 더 절실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갖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2:17) 하시는 주님이 더욱 가까이 느껴지지 않는가?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 우리 자신들이 가진 문제, 고통 모두를 가지고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나아갑시다. 그럴 때 다시 오실 주님 날 그의 앞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는 바울 사도의 당부도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믿음으로 가능하게 될 줄로 믿는다.

오늘도 순종하는 믿음으로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는 …

우리는 이미 五餠二魚의 기적을 상고 한바 있고 오늘 이 떡 7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4천명을 먹이신 사건도 내용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순서적인 것보다는 32절을 중심으로 의미적인 면에서 이해를 하고자 한다.



Ⅰ.신령한 약속의 성취이다.(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이것은 앞의 내용인 치료와 가르침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이라고 이해 하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을 향한 광야 40년의 여행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행이나 믿음 때문에 그들을 하늘의 떡인 만나로 먹여 살리신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섰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마시게 하셨다. 하나님은 밉건 곱건 그를 순종하는 자들의 일상을 책임져 주신다고 하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의 언약이 성취 되었듯이 복음 속에 언약도 역시 그대로 이루심을 확신할 수 있다. 주님은 그 삶 자체가 예언의 성취였고 행동하신 한 걸음 한 역사, 모든 것이 언약의 성취셨다.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셨던 가장 사실적인 모습이 바로 본문의 내용이라고 확신한다.

五餠二魚의 기적이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오늘 이 본문의 내용은 분명히 주님께서 주도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五餠二魚와의 차이점도 뒤에서 약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에서 조차 복음의 잔치를 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기뻐하며 또 그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을 위한 음식 조차도 함께 나누었던 역사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가진 성도들은 요즘의 시간에 쫓기는 식의 부흥집회를 아쉬워 하고 안타까워 한다. 이미 준비한 떡 부스러기는 바닥이 났어도 주님의 진리를 향해 여전히 갈급 해 하는 군중들, 배고픔도 잊은 체 영혼의 만족에 푹 빠져있는 군중들을 주님께서는 챙기고 계시는 것이다.

“길에서 기진 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은혜의 말씀 앞에 있을 때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기뻐하지만 그 은혜의 장소를 떠난 군중들이 다시 세상의 현실과 만나게 될 때 시장기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염려는 당연한 것이고, 또 사랑의 배려이다. ‘말씀 먹게 했으면 육신의 음식이야 각자 스스로가 해결해야지’ 하는 것이 요즘 우리의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주님은 합리성보다도 사랑 편을 택하시는 분이시고 자신과 말씀으로 함께 한 그들에게 이제는 풍성한 육신의 식탁으로 함께 하시는 것이다. 어쩌면 오순절 처음 교회가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나 이해가 된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 이런 입장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신 주님의 말씀은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본다. 같은 믿음을 갖은 여러분 모두도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함으로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 친히 채우시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는 …



Ⅱ.하나님의 긍휼은 자의적이다.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신 주님의 행사는 누구의 부탁이기 보다 주님께서 먼저 친히 준비하시는 식탁이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부류의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심을 성경에서 면면히 보게 된다.

범죄 한 아담과 하와를 찾으신 것도, 그들과 그들의 후손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도, 그들을 에덴에서 내어 보내시며 가죽옷을 입히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먼저 준비 하신다. 모든 구원의 역사 속에서 있어진 모든 역사 중에 사람이 먼저 구하고 준비한 일들이 있는가 찾아보면 역시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래로 준비하심을 본다.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신 것 조차도 그들이 모여서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고 오히려 그 약속을 기다림을 기도로 채웠다고 해야 옳다. 이것이 사실인가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성경적인 근거를 말씀 드리고자 한다.

누가는 베다니 앞에서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눅24:49)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의 복음서 말미에 기록하고 있고, 이 약속을 받은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께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24:52~53)는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다시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 하시니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3~5)

그러므로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도 120명이 마가의 다락 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린 제자들에게 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대속물로 양을 수풀에 걸려있게 예비하신 여호와 이래의 주님은 십자가의 희생도, 오순절의 성령도, 오늘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줄로 믿으시기를 …



Ⅲ.하나님의 긍휼은 차고도 넘친다.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주님께서 안타까워 하신 것은 다음의 제자들의 반응처럼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33) 한 것처럼 사실 군중들 스스로는 이미 한계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이미 풍성한 식탁을 마음으로부터 굶주린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하고 계셨다.

주님께서 계신 곳은 어디나 풍성하다. 앞에서 이스라엘이 사막에서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지만 비록 주님의 말씀과 치료의 역사를 좇아서 이 광야에서 허기져버린 군중들처럼 오늘 이 역사의 시간도 다르지 않다. 사람은 영혼의 만족이 없으면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허기를 느낄 수 밖에 없고,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했어도 주님께서 옆에 계시면 풍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는 모든 것이 다 있고 부족함이 없으시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뿐이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고백이 바로 495장 찬송이다.

1.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3.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1~4) 라는 만족도 같은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만족은 세상의 사라질 것들로 인하여 오는 만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기 때문에 만족한 것이다.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우리는 불과 얼마 전에 [야베스의 기도]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그 내용은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는 것으로, 사실 조금은 기복적(祈福的)이고 자기 중심적인 기도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하셨다는 내용으로 우리도 그렇게 기도함으로 응답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 특히 [야베스의 기도]를 읽었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기도를 했고 복을 좋아 하는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복을 빎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의 사례라는 데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성경 속에 하나님 측의 입장에서 더 마음에 드는 기도가 많이 있고 사실 복을 희구하는 사람들은 조금은 즐겁지 않을 내용이지만 한 예를 든다면 별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야게의 아들 [아굴]이란 사람의 기도이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어떻게 이런 기도가 가능할까? 그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물질은 필요한 정도에서 오히려 신앙에 더 유익할 것이라는 고백이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광야든지 사막이든지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작은 생선 두어 마리)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36) 임마누엘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넉넉함을 누림을 확신케 되는 것이다.



五餠二魚와 이 사건을 같은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사용된 떡의 수와 먹은 사람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깊이 들어가 보면 단어의 사용에서도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물고기[헬, 익튀스(ixthys)] - 작은 생선[헬,익튀디온(ixthydion)-명태와 노가리는 분명히 다르다.], 열 두 바구니[헬, 코피노스(kophinos)] - 일곱 광주리[헬, 스퓌리스(spyris), 행9: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이 은혜의 역사는 오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진정한 만족과 감사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은 어느 시대나 어김없이 성취되고 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 될 것을 확신하고, 우리가 주님께 구하기 이전에도 주님은 언제나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먼저 은혜를 준비하고 계신 분임을 고백하게 한다. 바울 사도는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1:11) 라고 마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것같이 자신이 늘 준비함을 고백한다.

주님의 긍휼과 사랑은 언제나 차고 넘쳐서 그를 모시는 삶의 장소가 어디이든지 늘 넉넉한 은혜를 누리게 하심을 깨닫게 한다. 영적으로 메마른 땅과 같은 거친 세상 길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늘 넉넉한 은혜로 입술에 찬송이 마르지 않는 4천명이 경험한 만족의 기쁨을 넘치도록 누리는 저와 여러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