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마 16:13~20 2005-07-1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오늘 본문의 내용은 공관복음에 함께 기록은 되고 있지만(막8:27~30; 눅9:18~21) 베드로의 고백에 따른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마가와 누가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우리 사람의 관계에서도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의 다른 자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주님께서도 당시에 제자로 선택된 제자들에게 예수자신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알기를 원하셨고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지시고 계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그의 신부된 교회를 향한 질문이요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성도라고 이름하는 세상에서 불러내고 구별한 각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질문이기도 하고, 이 질문은 적어도 모든 인류에게 하신 질문이고 반드시 각 개인이 답변을 드려야 할 질문이다. 그리고 각자가 드리는 답변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육신 속에서 믿음으로 이 고백을 드리고 합당한 예우로서 주님을 섬길 수 있다면 주님은 그를 영원의 세계에까지 책임지실 것이고 육신의 삶 속에서 고백하지 못한다면 영원의 심판대 앞에서 슬프게 심판주이신 그리스도로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형제인 나사로의 죽음 앞에 낙담하며 울고 있는 마르다에게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물으셨듯이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하여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이며 의미인가?” 물으시고 거기에 대한 답변을 듣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성경 속에서의 신앙고백은 결코 장황하지 않았고 오늘 이 주님의 단도직입(單刀直入)적인 물음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도 단순하면서도 함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또 신앙고백을 받았던 성경적 근거는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빌립에게 세례를 요청하자 “빌립이 가로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하자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노라!”(행8:37)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예배 시에 일반적으로 성문화해서 쓰는 ‘사도신경’과는 차이가 있다. 본래적으로 사도신경은 1세기부터 계속된 이단판별을 위해 만든 것임을 이해한다면 성경에 있는 그대로의 고백이 더 분명하고 사용된 성경적 전례를 존중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사도 신경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부터 지금보다 훨씬 많은 내용으로 전승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 전승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지금과 거의 같은 형태의 사도 신경이 채택 된 것은 서기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의 에베소회의, 451년의 칼케톤 회의를 거치면서 확정되어 진 것이고 이런 형태의 신앙고백문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의 이단성 규명을 위해서였으며 매 회를 거치면서 수정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신경을 일컬어 니케아 신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초의 종교회의를 참고하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라는 신앙적으로는 상당히 덕목이 있는 사람과 같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 보다는 몇 년 젊은 아다나시우스라는 두 사람의 논쟁에서 출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에 관한 것이었고 사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계속 거론되어 왔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교에 있어서 많은 신들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아들 하나님이 별도로 계시다고 하는 두 하나님을 주장하였고 예수는 모든 피조물의 제일 첫째 되고 가장 높은 그리스도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아버지와 같은 관계이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이론이었고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300명이 넘는 감독들이 참가했고 결국 아리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끝냈으나 완전한 논쟁의 종결에는 실패했으며 다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신앙적 의결이 첨부되었고 다시 451년의 제 4차 종교회의인 칼케톤 회의에서는 예수의 양성론이 제기되어 정리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A.D. 4세기경 라틴어[Symbolum Apostolicum] - 사도들의 상징이란 신조가 바탕이 된 [로마교회 구 신조]에서 형성되어 서방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하여 보급되었지만 동방 교회(희랍 정교회)에서는 한번도 사도 신경을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로 채택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이것과 비슷한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주님의 의미와 위치를 확인하면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의 사람들로 회복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



Ⅰ.세상의 예수에 대한 평가가 있다.(13~14)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내용을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을 하고 있어서 독특하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8:27) 하신 것으로 그리고 누가는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9:18)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그래도 사람들의 반응 중에서 듣기에 거북한 표현들은 다 빼고 좋은 반응들로만 답변을 드렸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 이스라엘의 반란자, 이단의 괴수 등등’은 다 빼고 “더러는 세례 요한(14:2), 더러는 엘리야(불의 선지자), 어떤 이는 예레미야(눈물의 선지자)나 선지자 중의 하나(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라 하나이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답변은 시대마다, 국가마다, 인종마다, 상황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는 가지각색이다. 4대성인, 박애정신의 주창자, 무저항 주의자, 평화 주의자 등등, 그러나 세상의 예수에 대한 평가는 바르지도 못하고 주님께서 바른 평가를 바라지도 않으셨다. 주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정확하고 바른 평가를 원하신다.



Ⅱ.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신다.(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래 세상의 평가는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단다. 내가 바른 평가를 듣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너희들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또는 주님을 섬긴다는 우리 각자로부터 분명한 평가와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은 또 다시 “나는 너에게 누구이냐?(Who I am?)” “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What I am?)”고 물으시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누구인가? 참으로 나의 가정에, 사업에, 인생에 있어서 누구인가? 라는 관계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고, 나의 삶에 무엇인가? 라는 의미에 대한 바른 답변은 우리 각자의 상태와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베드로와 함께 분명한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거침없이, 깊은 생각 없이도 자연스럽게 고백 되어질 수 있어야만 한다.

마치 주님을 버리고 옛날처럼 갈릴리에 고기잡이 하러 돌아간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7) 하셨을 때처럼 물으심이 고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간략하고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 분명한 관계와 의미를 고백드릴 수 있는 …



Ⅲ.우리의 고백에 따라 우리의 삶이 결정된다.(16~19)

1.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다.(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 = 기름부음을 받은 자.

①나의 주인이요 왕이라는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나의 생명의 주인, 나의 생명의 이유, 나의 삶의 목표, 나에게 상 주시는 분.

②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선지자 중의 대선지자라는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③나의 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는 제사장 중의 대제사장이라는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④세상의 신이라 칭하는 죽어있는 것들과 다른 친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과거의 어떤 위대하다고 하는 선지자들과도 구분하는 명칭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존경하던 불의 선지자인 엘리야도,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도, 예수 그리스도 바로 이전에 왔던 세례 요한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셨지만 그들은 사람일 뿐이었다.



2.사람 스스로 드릴 수 있는 고백이 아니요 주님께서 흡족해 하시는 고백이다.(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혈육의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가르치고, 암기시키고, 주입시켜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못한다. 전해지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그 역사에 순종할 때 비로소 한 인간 속에 그리스도로 예수는 고백 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바울 사도는 이러한 복음의 신비에 대하여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3.바른 고백이 곧 교회의 기초요 마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지키신다.(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바른 고백과 바른 믿음위에 세워진 교회만이 주님께서 책임지시고, 마귀의 권세가 힘을 잃고 하늘의 권세를 실행하는 지상의 유일한 하나님 기관이다.



Ⅳ.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정하신 때를 중시하셨다.(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