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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7:14~27 2005-07-31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 !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첫 부분은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지난 주에 상고한 산 위에서의 사건과는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안타까운 일도 친히 해결 하심으로써 주님의 전능 하심에 영광을 들어내는 동시에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능력을 잃어버린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능력과 권능을 가르쳐 주는 부분이다.

가운데 짧은 2절의 단락은 십자가로 다가가시는 주님의 대속의 역사를 증거 하시지만 여전히 아직도 육신적인 제자들은 이 사실로 인하여 근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 단락에서 성전 세의 이야기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납세 생활에 대한 성실을 가르치시면서도 그리스도의 전능하심을 증거 해 주고 있는 마태의 독특한 증거를 접하게 된다.

오늘 이 말씀 역시 공관복음이 모두 기록하고 있는 내용(막9:14~29; 눅9:37~43f)이지만 마가가 비교적 보다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세 마당의 말씀 중에서 우리는 주로 첫번째의 말씀에 집중할 것이다.

오늘도 이 말씀과 함께 우리 모두의 믿음을 점검하여 이 죄의 역사를 뒤집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에 함께 세우는 이 말씀을 듣는 …



Ⅰ.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놀라운 권능을 일깨워 주신다.(14~20)

하나님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산 위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 주신 것은 실지로 이 어두움의 역사 속에서 영광을 사모하고 소망하도록 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의 권세에 매여 자유를 잃고 신음하는 죄의 종 노릇 하는 산 아래와 같은 절망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끌기 위해 그런 신비하고 장엄한 체험을 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이 산 아래의 절망적인 형편의 사람들은 생각지 않고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는 잠꼬대 같은 부탁을 주님께 올렸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구원 받게 하신 것은 우리 개개인에게도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영광과 기쁨과 감사가 되겠지만 그것은 단순히 자신만 구원 받고 세상의 가련한 영혼들을 비웃고 저주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저주신 구원의 사랑을 감사하고 이제는 또 다시 나를 통한 구원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

내가 오늘 구원 받고도 만약에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영광을 맛보고도 자신들만이 영광에 머물게 해 달라는 세 제자들의 이기적인 욕망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중세 수도원주의와 같은 것이다. 세상과 동떨어진 복음이나 신앙은 의미가 없다.[우리가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두신 이유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요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오늘 내가 구원 받은 것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구원으로 불러들이도록 나를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를 통한 하나님의 뜻과 십자가의 은혜를 효력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경계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고 오로지 성령 없는 자신들의 의지 즉, 인간의 노력으로만 세상의 가련한 사람들을 구원해 보겠다고 설치는 것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 산 아래에서 간질병 걸린 아들과 씨름 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다름이 없는 모습일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도 신앙은 역시 균형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친히 맛보고 그 영광에 자신만 안주하려는 유혹도 경계 되어, 자신의 신비한 체험을 잃어진 어둠에 붙잡힌 영혼들 구원의 영광에 불러 들이는데 최선을 다하고 체험 없이 버려진 영혼들을 구원하겠다는 성령이 무시된 구령사업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므로 구원 받은 백성을 세상에 살게 하신 의미를 헤아려서 귀중한 복음의 역할을 감당하는 영육의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1.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탄식하시는 주님을 뵙는다.(14~17)

(14)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15)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①주님 없는 인생들은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진다.(15b)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火)에도 넘어지며 물(水)에도 넘어지는지라” 불과 물은 사람들에게 가장 유용하면서도 인간에게 주는 재앙의 으뜸이다. 잘 사용하면 힘이요, 따스함이오, 시원함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무서운 재앙(災殃)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과의 조화도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때 비로소 화평의 관계가 이루어 진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연 개발로 오늘도 불과 물에 자주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특히 이 아이는 ‘간질’로 인해서 물과 불에 자주 넘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 내심으로서 해결되는 것을 본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두 부류밖에 없다. 죄의 아래 그대로 잡혀 있어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귀신에게 사로 잡혀 있거나 아니면 그 죄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천국으로 옮겨진 성령의 사람뿐이다.

②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서 그렇다.

산 위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 바로 그 아래는 간질병 들린 아이와 그 가련한 아들을 애처롭게 생각하여 어떻게 든 낳게 해 주고 싶은 안타까워 하는 그 아버지[눅9:39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그리고 그 아이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를 치료 시키지 못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제외한 나머지 9명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을 비웃으며 예수의 역사를 이 때다 싶어 조롱하는 서기관들[막9: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이 함께 있었다. 이 3부류의 사람들은 다 제 각각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7) 하신 것은 능력을 이미 주셨음에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제자들[마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과 특히 그 기회를 절호의 찬스로 생각하고 제자들을 공격하는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대는 패역한 세대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주님은 안타까워 하시는 것이다.



2.적은 믿음은 결국 부끄러움만을 만들 뿐이다.(18~20)

(18)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없음)

예수님 당시의 모든 병은 귀신들렸다고 표현되고 있다. 오늘도 그렇게 표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담배귀신, 술 귀신, 도박귀신 하는 식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생들이 귀신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의 역사 이후에는 뱀의 머리는 이미 상해있기 때문에 모든 질병이 귀신들린 것이라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어떤 주경(註經) 학자들은 이 산 아래의 광경을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그림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말하면서도 사실적인 신앙에서는 하늘의 신령한 것들은 전혀 없고 온 갓 세상 것들이 우선시 되는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은 고사하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이름에 욕을 돌릴 수밖에 없는 수치스러운 오늘의 교회의 예증(例證)인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교회가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이 실행되지 않으면 여전히 세상에 끌려 다닐 수 밖에 없고 그런 입장에서 교회는 인간의 입장보다는 하나님의 권위를 세우려는 자세가 중요하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加減) 없이 철저하게 선언되고 지켜질 때 가능할 것이다.

①주님의 제자이면 예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라고 하셨다.(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 그런데도 왜 못하는가?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주님은 지적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능력은 믿음을 통해서 못할 일이 없을 능력을 주셨는데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20f)로 그 능력을 사용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②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지적하신다. 보이지 않는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큰 믿음과 적은 믿음이 있다고 지적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③이 역사 속에 믿음보다 큰 능력은 없다.(20)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세상의 어떤 물질이 과연 겨자씨만한 크기로 산을 옮길 수 있는 원소가 과연 있을까?

핵 폭탄도 그만한 크기로는 믿음만큼 위력을 발휘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농축된 우라늄이라고 해도 그것을 터뜨리는 기폭장치가 되지 않고서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에 미칠 수 없다. 세상의 전자 제품과 컴퓨터 부품들이 점점 소형화 되어 가고 있지만 겨자씨 만한 폭탄은 어떤 것이든지 산을 옮길만한 것은 확실히 없다.

그럼에도 믿음은 산을 옮기고 못할 일이 없다고 약속하신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믿음은 누가 가진 믿음을 말씀하시는가? 이 믿음은 특별한 사람들만 가지는 믿음인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우리가 갖고 믿음이 이 믿음이다. 믿습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면 이 놀라운 믿음은 동일한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주님의 약속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그러한 믿음을 가졌다면 교회가 모였을 때는 분명 세상에는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 우리는 이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갖지 못해서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수치스러운 제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한 영혼의 보이지 않는 죄를 파괴시키고 천국을 세우는 능력은 보이지 않는 적은 믿음으로 이루어 진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과연 하나님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주신 것이 분명한데 그 거저주시는 능력의 0.001%로 사용을 못해보고 우리가 간다면 얼마나 가련한 인생인가?

산을 옮길 수 있는 놀라운 믿음의 폭발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의 도구들로 역할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



Ⅱ.비전이 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모습.(22~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분명히 제자들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일이지만 큰 일은 반드시 장애를 뚫고서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하고 근심하고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믿음이 적은 연고이다. 이 제자들의 모습을 정리해 보면 ①현실을 보면서 미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②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지 못했다. ③고난 뒤의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하며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큰 난관도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생각하고 가로막히는 것으로 인하여 낙담하지 않는다.



Ⅲ.조금의 오해도 만들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주님을 보여 주셨다.(24~27)

(24)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반 세겔 받는 자들은 본래 율법에 명시된 성전 세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기원을 보면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 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출30:13~15) 라는 말씀에서 예수님 당시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전세를 받는 사람들이 예수께는 직접 말하지 못하고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께서 반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여태껏 내 오셨다고 말하고 집에서 예수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 세를 내는 것을 세상 왕자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신 후에 그러나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내라고 하시고 이 일을 가르치시는 중에 또 하나의 기적을 통해서 이일을 해결하시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결국 이 교훈도 율법의 일점일획도 어기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모습을 보이시면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국가에 대한 의무에 철저할 것을 가르치신다.(롬13:1~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는 바울을 통한 교훈과 다르지 않다.

때로는 ‘우리는 하늘의 절대적인 법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세상 법쯤이야 초월할 수 있지 않느냐!’ 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러한 주님의 실제적인 삶은 역시 우리의 모범이 되심에 분명하다.



하늘의 영광을 경험케 하신 것은 산 아래 어두움에 사로잡힌 인생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뜻임을 잊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고 그 산 위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고는 어두움의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믿음의 거듭난 눈으로 천국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주신 믿음은 세상의 어떤 세력보다도 비교될 수 없는 능력을 가졌음을 확신하고 그 주신 권능을 가지고 죄와 절망의 세상을 의의 세상으로 뒤집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