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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8:21~35 2005-08-21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  
오늘 우리가 읽은 주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긍휼과 인간의 한계를 비교하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4~16) 라고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자신은 몸으로 완전한 화목제를 완성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지난 주 말씀에서 ‘과연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있겠는가?’는 말씀을 나눴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로 오늘 주시는 말씀이 이에 대한 확신이다. 이사야를 통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는 초청은 사실 온 인류를 향한 골고다 십자가 아래로의 초청이다.

성미가 급하면서도 확실한 베드로 사도는 적어도 자신의 입장에서는 최대의 기준에서 주님께 용서의 기준을 물어보고 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 실재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생각에서 ‘일곱’은 완전 수로 취급되고 있고 성경에서 무결한 일들의 횟수를 다룰 때 ‘일곱’이라는 수로 대신한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피나 정결의 기름을 일곱 번 성소에 뿌릴 것을 명령하신 내용은 너무나 많고(레4:6, 14:16), 매 일곱번째 해는 안식년(레25:4)이고 안식년이 일곱번째 되는 해를 희년(레25:8)이라 했고, 여리고를 정복하기 위해서 역시 7일간 돌다가 마지막 날에는 일곱번을 돌 것을 명령하셨고(수6:4, 15), 갈멜산의 전투 후에 비가 오리라는 예언을 한 후 게하시에게 바다 쪽에 구름이 떠 오르는 것을 보기 위해 일곱번 다시 가라 명하는가 하면(왕상18:43),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리는데 일곱번 재채기 하고 살아났고(왕하4:35),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하여 아람 군대의 장군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일곱번 담그라는(왕하5:10) 명령을 주셨고,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시12:6)다고 고백하고, 요한 계시록에는 이 역사 속에 존재하는 교회를 모두 일곱 교회로 묘사하고 있다.(계1:20)

어찌 보면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묘사하는 표현들은 일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주님과 베드로는 이 용서라고 하는 귀중한 문제를 이 “일곱”과 함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뜻밖의 질문에 주님은 더 큰 관용을 강조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22) 여기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차이가 나타난다. 사람의 최고의 용서와 긍휼은 결코 하나님을 따를 수 없음을 보는 것이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표현이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17:4)는 기록을 잃는다. [죄는 회개한 것만 용서되는가?]

이 모든 가르침은 죄는 용서 받기 위해 있는 것으로까지 이해하게 된다.

사실 하나님은 용서 받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시는 분이시고 이러한 놀라운 긍휼을 힘입어 한계를 가진 우리 사람의 용서와 사랑은 극복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이라는 본받음과 우리의 허약한 의지보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큰 힘이 되고 감사가 된다. 주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도 용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신다. 그래서 오늘도 마련된 골고다의 십자가 아래로 죄의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자신의 독생자를 죄 값으로 희생시키시고 그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유효하게 사용하도록 하나님은 죄인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318: 후렴)

주님의 용서는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용서이다.



Ⅰ.하나님의 복음을 통한 용서를 본다.(23~27)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역시 하나님 편에서 먼저 이시다.

대개 성경 속의 “달란트”는 일꾼 한 사람의 15년 이상 일한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그러므로 여기 “일만 달란트”란 오늘의 숫자 단위로 정확한 계산이 힘들지만, 한 사람이 최소한 150,000년을 전혀 쓰지 않고 저축해야 벌 수 있는 액수(하루임금을 8만원으로 계산하면 4조 3,800억원]이고 사람이 길게 살아야 100년을 산다고 볼 때 인간측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숫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빚을 진 입장에서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26) 라는 말은 사실 가능성이 없는 약속에 불과하다.

사실 모든 사람이 인정하든지 하지 않든지 각 사람의 죄의 무개는 스스로는 는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기의 부채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죄의 가볍고 무겁고를 이야기 하지만 죄라는 무서운 빚은 스스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영원의 빚일 수 밖에 없고 이것 때문에 인간의 행복은 멀기만 한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죄의 해결이야 말로 날아갈듯한 기쁨과 해방 감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고백하기를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5~8) 하였다.

여기까지의 모든 조짐은 절망뿐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드디어 광명한 소망의 빛이 선언되고 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27) 감당할 수 없는 빚의 해결방법의 유일한 길은 채주(債主)가 부채(負債)를 탕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현행법으로도 합법적인 법적 구속력을 갖는 것으로 안다.

우리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절망의 빚인 죄의 빚을 탕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계획하셨으며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탕감이라는 일방적인 방법보다는 공의를 충족시키시기 위하여 자신이 온 인류의 죄를 친히 지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분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의 심판이요,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함께 어우러진 구원의 역사이다.

IMF 이후에 많은 ‘신용 불량자’들의 고백을 듣는다. “뭣이든 좀 해보려고 해도 사실 ‘신용 불량자’라는 것이 나를 붙잡아서 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바울 사도의 죄에 대한 탄식과 같은 말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나 바울은 연이어 탄성을 지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7:25)

스스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지고 영원한 흑암에 돌아갈 절망의 운명은 어떤 사람도 피해갈 수 없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정해진 운명일 뿐인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는 사랑의 선언과 함께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10:11)라는 복음이 이 땅에 쏟아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27)는 바로 인류에 주어진 하나님의 복음이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그 엄청난 사랑의 역사에 나를 믿음으로 맡기기만 하면 죄에서의 자유를 넘치도록 누리게 하신다. 더 이상 하나님께 신용불량자가 아니다. 할렐루야!



Ⅱ.율법과 같은 인간의 용서를 비유한다.(28~30)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평생을 모든 가족을 동원해서 일을 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부채를 탕감 받은 이 종은 자기가 탕감 받은 것에 비교될 수 없는 하찮은 적은 빚을 진자에게(여기 ‘데나리온’은 그대로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은화(銀貨)의 단위이다. 그러므로 백 데나리온은 일용 근로자의 석 달 열흘 정도의 임금으로 800만원에 해당한다.) “…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28b)고 요구를 하고, 이 동료도 이 빚을 탕감 받았던 사람이 했던 것처럼 긍휼을 구하고 있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29) 이것은 사실 갚을 수 있는 진실된 답변으로 자신 보다도 확실한 답변이다.

그러나 연이어지는 답변은 더욱 절망적이다.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30) 했는데 이 모습이 바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절망과 죽음의 저주를 해결 받고도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름뿐인 은혜롭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이 사람을 가두는 것 보다는 돈을 벌게 하는 것이 오히려 빚을 빨리 갚게 하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둠으로써 갚을 길마저 막아 버리는 비극을 부르고 있다.

언젠가 그런 말씀을 드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마귀 사탄이 아닌 이상 어떠한 원수도 미워하는 대상이 있어서도 안된다.’는 신앙적 논리를 말씀 드린 바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세는 아직도 사죄에 대한 감격을 갖지 못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야고보를 통하여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고 선언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십자가는 결국 심판을 이기고 온 인류를 죄에서 자유케 하는 놀라운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어떤 이유에서건 죄의 대가를 요구하는 긍휼 없는 심판의 법이다. 이런 이유에서 복음 속에 살면서 아직도 율법의 조항들을 부분적으로라도 요구하는 신앙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율법의 유일한 역할은 어떤 경우에도 죄인은 죄의 대가로 반드시 형벌 받아야 마땅하다는 이유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그리스도에게로 죄인들을 데려오는 외에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28b)는 모습은 어쩌면 오늘날 쉽게 남의 인격을 모독하는 죄의 사람들 속에서 너무나 난무하는 일반적인 모습이요, 죄의 성격은 이렇게 무자비하고 잔인함을 본다. 우리 인간의 알량한 자세는 늘 하나님께는 넘치도록 받고 받기를 기대하면서 이웃과 형제에게는 너무나도 각박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영원한 형벌을 탕감 받은 은혜 받은 자들임을 깨닫는 …



Ⅲ.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31~35)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문제는 이러한 악한 행위를 그의 동료들이 보기에도 무참했던지 자신들의 주인이자 이 사람의 빚을 전부 탕감해준 주인에게 이 사실을 이르고 만다. 주인은 다시 그를 불렀고 그에게 주었던 은혜의 사실을 증거하고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32b) 주님께서 해 주신 것을 본 받아 행치 않는 자는 악한자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33) 하나님은 절대로 근거 없이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반드시 모범을 제시 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6:36)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3:34, 15:1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5:2f)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하나님은 무한히 용서하시고 참으심에도 그렇지 못한 자들은 벌하시는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은 진노의 대상으로 남고 만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4) 그러나 형벌의 모습이 차이가 있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갚지 않은 자를 단순히 옥에 가들 뿐이었지만(30) 주인은 이 사람을 고문하는 자에게 붙이고 만다.[옥, 휠라케(phylake), 감옥, 감금 (행5:19); 옥졸, 바사니스테스(basanistes), 고문하는 사람, 괴롭히는 자, 간수] 지옥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이 없고 이 사람은 영원히 빚을 갚을 길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형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오늘의 결론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하셨는데 이 말씀은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빚, 오훼이레마(opheilema), 부과금, 실수, 빚진 것, 과실, 허물]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라는 사상과 연결되어짐을 깨닫는다. 사실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신 이 말씀 조차도 아직 율법적이다. 우리 모두는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를 용서 받았으므로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허물과 실수는 당연히 용서 되어야만 옳은 것이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용서를 받아 자유인이 되었다면 적어도 우리 일생에 있어서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33)고 물으시면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고 경고하신다.

우리 모두가 나 자신의 허물과 죄를 용서 받은 확신과 감격을 먼저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형제와 자매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신 후에 연이어 선언 하시기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1:19~20)는 약속도 주신다. 여기서도 관건은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진정한 형제라면 용서 못하고 남겨둘 허물은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4~15)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3~15) 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