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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마 19:1~15 2005-08-28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1)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하시고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요단강 건너편의 유대 지경인 베뢰아를 지나시는 길에서도 많은 교훈을 베푸셨고 오늘 본문부터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로 한발 한발 다가가시는 가운데도 귀중한 신앙적 교훈을 주고 계시다. 이 지역에서도 역시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약함을 치료 받는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을 마태는 기록하고 있다.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2) 사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주변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육신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 뿐이었다.(마13:54~58)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되는 본문은 많은 결혼식장의 주례사의 본문이 되는 말씀으로 중요한 주안점은 남녀의 문제 즉 혼인 속에서 발생하는 사람들의 병패를 원리에 입각해서 해설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 가르침도 바리새인들의 완악하게도 주님을 시험 함에서 제자들의 의구심까지 해결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본다. 주님을 넘어뜨리려는 악의 세력은 그 때나 지금이나 시간이나 장소가 따로 있지 않음을 보면서 늘 경성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배운다.

사실 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을 제는 척도는 ‘남녀의 문제가 어떤가?’에서 해답이 나올 정도로 남녀의 성의 문제는 사회의 도덕성의 척도가 된다고 해도 그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가장 구체적으로 쓸 때도 남녀가 기준이 된다. 자연스러우면 가장 편하고 감사할 수 있는 부분도 이 부분이고 당연히 부자연스러우면 가장 힘겨운 부분도 부부의 문제이다.

이 결혼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우리는 근본에서 풀어가야 할 것이다. 이 원칙은 사회 인문, 영육의 모든 문제를 총망라해서 그렇다. 결국 시작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실마리는 나타나게 되어 있다. 어떤 나타난 현상들로는 결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실 율법에 있어서 가장 경건한 척하는 바리새인들조차도 남녀의 문제에 있어서 만은 당시까지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볼 수 있는데 헤롯의 비정상적인 결혼을 지적하고 죽임을 당한 세례요한처럼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방법으로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고 물은 것 같다. 저들이 보기에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아직 미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혼의 문제만은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라는 계산에서 궁지에 빠뜨려 제거하려는 음흉한 의도에서 접근하지만 사실 남녀로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주님이셨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남녀의 문제는 주도권 다툼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와 ⓑ타락 ⓒ회복의 문제에서 다루어져야 하고 시대에 관계없이 근본적인 문제에서 논의 되어야 한다. 남녀의 관계도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의 세례라는 주님의 약속을 통해서 비로소 완전해지고 평등해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7~28) 즉 본질적인 죄성의 사람이 죽고 거듭남을 통해서 회복되어짐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교회의 공식 예배에 대한 질서를 가르치면서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14:34~35)고 권면하고 그 이유를 목회서신 속에서 이해 시키고 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2:11~14) 이것은 차별(差別)이 아니라 차이(差異)의 문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현 사회의 도덕적인 피폐와 함께 가정이 무너져가는 오늘의 시대에 주님의 가르침은 절대적인 원칙을 제공하고 남녀의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가르침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평안과 자유를 주시는 은혜를 더불어 누리는 …



Ⅰ.절대적인 원칙은 무너질 수 없다.(4~6)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모든 문제는 근본에서 풀어가야 한다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시면서 왜곡되고 비틀린 사람들의 혼란을 바로잡아 주시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여기서도 본다. 비록 저들이 악의적으로 시험하려 하였을 찌라도 이 기회를 통해서 제자들과 오늘의 역사 속에 우리들에게까지 기준을 확인해 주시는 주님께 찬양을 드릴 수 밖에 없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4) 우리는 창세기의 첫 부분을 읽으면서 인류의 기원과 남녀의 신비한 관계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이 말씀은 인간 창조의 보다 총론적인 기록이고 2장에서는 좀더 자세한 창조의 내용을 서술해 주고 계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7)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18) “…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20b~25)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어놓고 보시니 혼자인 것이 안타까워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을 지으시기 전에 남녀로 지으실 것을 계획하신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신비한 구조와 부부라는 인간의 보다 근본적인 면모를 보게 해 주는 중요한 단서들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특히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본래, (헬)아르케(arxe) (요1:1-태초) beginning, origin; 시작, 기원, 처음]라는 말씀을 쓰셨다.(4-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8-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사람이란 근본적으로 젓가락처럼, 신발처럼 한 켤레로 만들어졌다는 가르침이다. 물론 젓가락 하나로도 국수를 먹을 수는 있지만 분명히 한 켤레처럼 자유스럽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남녀, (히)자카르(zakar), 여자, (히)네케바(neqebah]로 짝이 맞아야 만드신 의도대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부부란 둘이 하나처럼 자유스럽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란 의미이다. 요즘 성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존재이유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탐닉과 쾌락의 도구로 다루어지면서 이런 창조의 질서는 무너져 버리고 학대로 옷을 가리는 영적인 세계가 피폐해졌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탄식하신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말2:14~16)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5~6) 여기에 결혼의 신비가 있고 나누질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부모를 떠나야 할 시기쯤에 하나님께서 이 역사와 공간의 어느 곳엔가 준비해 두신 자신의 반쪽을 찾으려 하고 그 반쪽을 찾으므로 비로소 완성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떠남과 만남의 역사를 통해서 잃었던 반쪽을 찾게 되어 비로소 한 몸을 이루게 되고 더 이상 자신의 반쪽을 통해서 해결하게 되는 욕구도 수치나 불법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합법적으로 해결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감사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 처음, 일생에 한번 있어야 하는 하나됨은 하나님의 바라시는 완성일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나눠질 수 없는 비밀과 신비가 있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 서로의 늙어감은 감사의 이유가 되고 만족과 기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녀가 일대 일의 관계 속에서만 건강을 상하지 않고 성을 향유하게 하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적어도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되고 보호되는 것이 창조주의 약속이다. 이런 입장에서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6)는 말씀은 시대에 관계없이 지켜가야 할 근본적인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은 완전한 하나이지만 그것을 인위지적으로 나누고 재결합을 하는 것은 사람의 보기에는 차이가 별로 없지만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는 마치 플라스틱 그릇이나 사기그릇을 깨어서 붙인 흔적처럼, 찢어진 가죽옷을 잇대어 기운 것처럼 몰골이 사나운 것이다.

어떤 말씀이든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해야 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최종적인 해결 책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진리요 바뀔 수 없는 절대 원칙으로 이것이 어겨졌을 때 언제나 어긴 사람이 만회할 수 없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는 약속은 사람들의 안녕과 평안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역사의 끝 날까지 지켜져야 할 영구불변의 원칙이요 법이다.



Ⅱ.사람의 완악함이 늘 원칙을 무너뜨린다.(7~9)

(7)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는 주님의 답변에 바리새인들은 또 다시 율법에 허용된 이혼을 들어 재시험을 하고 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7) 이 말씀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신24:1~4) 라는 말씀에 근거한 이론이다.

최초에 남자와 여자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질서는 창세기 4:19에서 무너진다.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그리고 이 사람은 살인자인 가인의 후예로 성격이 포악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사람을 쉽게 죽이는 폭군으로 나타난다. “…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23b)

그리고 이러한 전례들은 성경 속에서 확대되고 와전되어서 계속 문제를 일으킨다. 결국 여러 명의 아내가 인간의 완악함과 정욕으로 인하여 허용되기는 했지만 역시 얻은 것 보다는 언제나 잃는 면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는 주님의 말씀은 마치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는 말씀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임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복음 속에서도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7:2)했고 5절에 다시 “…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권면했고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9)는 권면을 바울사도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결혼의 관계는 고전7:1~3절에 육신에 있는 동안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눅20:34~36)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는 말씀은 어떤 핑계로든 한 몸이 쪼개지는 것을 경계하여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미 마5:32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는 주님의 경고를 들은바 있고 누가도 그의 복음서에서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16:18)는 주님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에덴에서 잃어버린 영생을 회복해 가는 교회의 직분자들의 자격을 다룸에서도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3:2; 딛1:6)하였고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딤전3:12) 라는 원칙이 교회 속에서 지켜 져야만 한다.

비록 시대가 바뀌어서 이혼과 재혼이 일반화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회복기관인 교회 속에서는 이러한 근본적인 원칙이 지켜져야만 할 것이다. 사람의 완악함이나 정욕이 본래적으로 만드신 주님의 법 질서를 어긴다면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는 해 줄 수 있어도 하나님께는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인간에 의해서 무너진 역사는 다시 십자가 위에서 회복되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족 시키는 교회로서 존재해야만 할 것이다.



Ⅲ.성적(性的)인 절제(節制)는 타고나야 가능하다.(10~12)

(10)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11)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주님의 근본에 대한 답변을 들은 제자들은 역시 인간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소화하는 것을 본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10) 주님의 절대적인 원칙에 인간은 다시 절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제자들조차도 당시로서는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무엇에나 예외는 있다. 그렇지만 성적인 욕구에 대한 예외는 하나님께로 부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젊은 청년의 때 사람들은 더러 “나는 주님을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해보는 것을 더러 듣는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들이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11)는 말씀을 봐도 분명하다. 독신이었던 바울은 오히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9)고 권면 한다.

성에 대한 욕구에 둔감한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12)는 말씀은 결국 모두가 근본적으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모두나 스스로의 인간적인 결심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가르치는 표현이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하신 것이다.

우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나 바울처럼 꼭 독신이어야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우리는 주어진 각자의 성격과 상황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고전7:28)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육체와 인격에 가장 맞는 사람을 지금 우리에게 배필로 주셨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해서 만은 절대로 ‘만약에~’ 라는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지금은 대상이 나에게 가장 맞기 때문이라는 확신으로 주님과 대상에게 충실할 필요가 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13~15)고 기록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18:1~10에서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3~4)는 교훈을 읽었다. 이 남자와 여자로 하나인 사람의 가르침 뒤에 이 어린아이의 가르침이 연결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수하게 순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주님께 축복을 바라고 오는 어린 아이의 단순함으로 이 말씀을 받는 자들에게 주님의 약속은 유효하게 될 줄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