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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8:17~25 2008-05-18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처음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던 에덴에서 사람은 범죄로 인하여 쫓겨났고 사람에게 맡겨진 자연 속에도 가시와 엉겅퀴가 나서 땅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게 되고 만다. 그럼에도 창조 이후로 가장 변화가 적은 것은 사람을 제외한 피조물들이다.

풀을 먹고 살았던 동물들은 아담의 범죄 후에 비록 자연스럽지 못한 약육강식의 모습으로 바뀌어 피를 흘리며 잔인하게 먹고 사는 모습이 되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라 그들을 다스리게 한 사람의 범죄 때문이기 때문에 동물들도 회복될 미래의 세계에서는 처음 창조의 자리로 회복될 것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그러므로 짐승의 잔인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식생활(食生活)도 사실에 있어서 짐승들 역시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도 오늘의 말씀에 따르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요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것일 뿐이며 인간의 죄의 심각성을 절감하게 된다.

오늘도 우리는 분노하는 자연을 본다. 인간에게 보복하는 것처럼 난폭해 보이는 자연을 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 역시 순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찌 보면 자연이 더 대범하고 우람하고 용감하며 인내하는 것을 많은 곳에서 깨닫게 된다.

자연은 하늘을 품고 사는데 그 자연을 다스린다는 사람들은 겨우 좁은 자신의 마음도 지키기 어려우니 미물들 앞에 부끄러울 뿐이다. 비록 이름없는 풀 한 포기일지라도 태풍이 지나가도 우박이 쏟아져도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그 자리에 찢어진 모습으로 다음 날의 햇살에 그대로 앉아서 상처를 받았다고 떠들지 않고 묵묵히 할 수 있는 모습에서 최선을 다하여 회복을 향하여 애쓰는 것을 본다. 자연은 어떤 조건에서도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안다.

이런 천연덕스러운 자연을 보면서 비록 허무한데 종노릇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아들들의 회복을 기다리면서 인내하고 복종하는 미물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의 섬김의 자세를 배우고, 또 그들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온전한 구속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민감할 수 있는 …



Ⅰ.피조물들조차도 나타날 영광을 고대한다는 기막힌 고백을 듣는다.(18~19)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우리가 현실을 사는 데는 두 가지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먼저는 오늘, 이 순간 우리가 처한 형편이 어떻든지 그것을 감당하는 것과, 소망을 가지고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다 감당치 못한다면 사실 이름없는 들풀 한 포기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이 죄가 관영 하는 세상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실을 이겨내고 있다.

그것이 비록 사람의 범죄로 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을 향하여 욕설을 퍼 붇지 않는다.

만약에 사람들이 다른 것들, 그것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피해를 당한다고 생각할 때 견디지 못하여 욕설을 퍼 붇는 것이 너무나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짐을 본다.

범죄 후 최초의 사람 아담으로부터 이러한 좋지 못한 습성은 시작되었고 그 후의 모든 아담(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음을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것 때문에 …” “누구 때문에 … 나는 이렇게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하기에 바쁘다.(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죄의 습성이다. 죄는 사람을 자기 수하에 넣게 되면 자신의 비극을 모든 다른 사람들과 주변에 전가 시키는 것을 본다.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항변하지만 사실에 있어서 이러한 모습에서 진리의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자유 하지 못한다.(요8:32)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 자들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는 고백을 듣게 된다.

비단 다윗과 솔로몬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사랑의 사도라고 하는 사도 요한 까지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라고 확신을 증거하고 있고, 이것은 그가 평소에 주님으로부터 보아왔던 모습들이었을 것이다.

죄의 역사가 절정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이 어떤 자세이어야만 하는 가를 보여주신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 예수 때문에 나라가 편치 못하다.’고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하여 삿대질하고 비웃고 욕할 때에도 주님은 그들을 아버지께 고발하지 않으시고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23:34)는 기록을 본다.

이것을 친히 봤던 베드로 사도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2~23) 라고 증거하고 있다.

사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 주변의 비극과 아픔이 자신의 허물과 죄 때문이라고 탄식하게 되는데, 이것은 말 못하는 자연은 이미 실천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 위에 군림하려는 우리가 배워야 할 모습이다.

이 불완전한 세상 위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는 고백으로 주어진 형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자세를 우리는 피조물들에게서 배워야만 할 것이다.

이 제목에서 두 번째로 피조물들에게서 보는 것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19)이다. 비록 영혼을 갖지 못한 피조물들이지만 파괴당하고 유린당하면서 오직 하나의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견디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만유의 회복이다.

우리가 사도행전 속에서 이미 나누었던 말씀처럼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3:21) 했던 것처럼, 우리 사람들은 만유의 회복에 대한 기대를 별로 갖고 있지 못함에도 사람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다시 오심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 온전히 회복되고 죄로 인하여 신음하고 있는 이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절망이 치료될 것을 고대하면서 현실의 아픔을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신음을 들을 수 있는 영성(靈性)을 회복해야만 한다. 말이 없고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자신을 다스리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자신들까지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자연은 묵묵히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자녀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인내와 사랑을 감사하고 함께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자연은 비록 인간의 범죄의 결과로 신음하고 있으면서도 나타날 영광을 기대하면서 오늘의 고난을 묵묵히 견디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고 있다. 미물의 자연들도 이러는데 오늘 나는 어떤가! 우리 모두는 이러한 미물 앞에 그들의 소리 없는 설득을 듣고 경성하는 …

사람을 제외한 모든 자연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현재의 세상보다 회복될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있다는 놀라운 고백을 듣는다. 오늘 우리는 과연 나타날 미래를 얼마나 기대하는가 스스로에게 묻는 …



Ⅱ.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됨을 기대함.(20~22)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피조물들이 범죄한 인간에게 순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복[헬, 휘포타쏘(hypotasso), 밑에 두다, 아래에 배치하다]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고 그런 것을 누가 바라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자연을 다스리는 인간은 관리하고 지켜가기보다는 소유하고 파괴하려는 것이 죄진 인간의 속성으로 자연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대단히 정욕적이다.

“동물들의 병이 발생하는 이유를 사람들이 자연의 균형을 깨뜨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환경파괴가 다시 사람에게 위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뜻이다. 13일 장지지구에서 방역 작업을 하던 직원들의 모습이 지구의 마지막을 다룬 영화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고 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해서 닭과 오리를 살 처분하고 있는 위생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을 조선일보 채승우 기자는 전한다.

우리 모두가 사람이지만 우리 인간의 정욕은 한이 없고 만족이라는 것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재산 가치가 큰 땅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소유하려 하고 특히 이 나라를 다스리고 이끄는 정치가들이 이런 일에 더 선봉이 되어 있다.

이유는 땅의 가치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생각 자체가 서글프다. 인간의 가치는 하락하고 땅의 가치는 거의 변동이 없기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는 사람이 땅을 소유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그래서 사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려 한다는 것 자체도 비록 흙과 돌들로 구성된 말 못하고 생명이 없는 부동산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이 자신의 주인 됨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20)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다른 피조물들만큼 순종하고 있지 못함을 책망 받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원치 않지만 창조주께서 자신들을 사람의 통치 아래 두셨기 때문에 허무한 데 썩어짐의 종 노릇 하는 것일지라도 굴복케 하시는 이 즉, 하나님의 지시 때문에 굴복을 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순종해야 하겠는가?

그 굴복이 바로 썩어짐의 종 노릇이지만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21) 한 것처럼 언젠가는 그런 원치 않는 데서 자유케 하실 그 날을 고대하면서 묵묵히 창조주 때문에 굴복을 하면서 언젠가의 해방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이 우리에게 순종하는 것에 교만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22) 흙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죽어 자신의 품속에서 썩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이고 이번 중국 쓰촨성의 지진으로 인하여 매몰되어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안고 흐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탄식과 애통을 들어야 한다.

그 탄식과 고통은 바로 죄로 인하여 절망하는 인류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연민이며 긍휼이고,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친히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과 함께 안타까움으로 인한 탄식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안타까워하신다. 185:1~2.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3.죄중에 빠져서 영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자연의 고통과 탄식과 함께 눈물로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울음을 들을 수 있는 영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13:34) 라고 우시는 주님의 모습은 오늘 같은 모습으로 일그러진 우리들의 영성을 인하여 우심으로 듣는 …



Ⅲ.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님.(23~25)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지금까지 자연 속에서 신앙의 자세를 지도 받았다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세이다. 수없이 듣고 배워도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면 예수께서 경계하시는 대로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6~27)는 두려운 교훈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세상적으로도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듣는데 이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 하나님의 성령께서 자연을 이해하고 탄복하자고 이런 가르침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주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30)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 가운데 자주자주 “하물며, 하물며”를 반복하신다.

어떤 비유를 주셨던지 그것은 사실 사람을 교훈하시고자 하는 것이 가장 귀중한 목적이라는 말씀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자연 삼라만상이 고난과 허무한데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 하면서도 해방과 영광과 자유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하물며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데 다른 피조물들보다는 더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권면이다.

우리 중에 누구도 내가 미물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가치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하나님께서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막8:37)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나 충성에 대해서는 우리가 미물의 자연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들의 백합화를 비유하거나 공중의 새를 비유로 드시는 것은 그런 하찮은 것 하나에게까지도 세심한 관심을 가지시는 우리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 사람은 얼마나 더 귀하게 다루시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 자연의 하찮은 것들을 가르침에서 비유로 사용하시는 목적이다.

요쯤 세상이 점점 타락해 가면서 스스로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일들이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표현이 실감이 난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의 사람들은 그만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을 살펴봐도 다르지 않다.

생명을 가진 피조물들도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려고 애쓰는데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우리가 자연만 못해서 되겠느냐는 안타까움이다.

예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7~48) 하셨는데 이런 입장에서는 다시 오실 주님 앞에 내가 많이 안다고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은 우리는 더욱 이 불안전한 육체를 벗고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한 아들로 완성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더욱 기다리고 사모하는 자세가 다른 모든 피조들만 못해서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속이 보이는 세계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불타서 사라질 세상에 너무 집착하여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말은 못하고 소리도 없지만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며 허무한데 굴복하면서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소망하며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피조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피조물의 기대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른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때 바로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아직은 이런 가르침이 오히려 먼산의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5)는 마지막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인내하며 오직 이 한 가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을 깨닫는다. 과연 누가, 어느 교회가 이 일의 중심이 되어야 하겠는가?

[373:3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하도다,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오늘도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성령은 물론이고,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의 이러한 귀중한 역할을 기대하며 기다린다는 호소를 새겨들을 수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