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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16:1~4 2018-01-07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누가복음12:54~56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이 말씀이 사실에 있어서 믿음이 바른 사람들에게 주신 교훈이 아니라 옳지 못한 대상에게 주신 말씀이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시대의 눈을 속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유명한 마술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못하면 어느 것 하나도 바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믿음 없는 눈으로 성경을 보면 어느 것 하나도 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없이 모순투성이고 허황된 말들처럼 들릴 뿐이다.

믿고 순종하여 세례를 받고 거듭난 이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주어지고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는 교훈이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요한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고 같은 권면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주님의 절대성을 믿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요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뿐이다.

성경을 깊이 없이 입으로만 읊조리고 표시로만 눈 사이에나 문 사이에 두고 만지기만 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심지어는 예수님을 찾아 왔던 나다나엘조차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1:46)고 의심하는 것을 보는 것은 이들의 반응이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를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임을 보게 된다.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순이 신앙으로 얻어지는 유익(富와 승리와 치료)만을 생각하고 믿음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비록 기적을 본다고 할지라도 육신의 즐거움뿐일 것이고 영원의 세계 속에는 별 유익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경계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고 직접 말씀하신 주님의 교훈이다.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보다는 신앙이 문화(文化)에 끌려 다니면서 보이는 세상의 변화에는 민감해지면서도 보다 영원한 영적인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없다면 분명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비극일 수 없다. 유행의 흐름이나 변화에는 민감하지 못할지라도 점점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더욱 절실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한 공부는 지나칠 정도로 주문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원의 세계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들어서는 주님 앞에 다시 서는 일이 부끄러울 것이기 때문에 새해를 맞으면서 영적인 부분에 더욱 민감할 수 있는 하늘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한다.



Ⅰ. 표적을 보는 것은 누구나 좋아한다.(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도 믿음의 사람들은 구태여 표적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했는데 오죽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 안타깝게 말씀 하셨다.

표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아시는 주님께서 오히려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셨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8~39)

그럼 표적을 본 사람들은 과연 다 믿었는가! 사실 그렇지 않았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표적으로 인기가 올라가는 그리스도를 더욱 적대시 하였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요11:47)

야비한 여우 같은 헤롯조차도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눅23:8)는 기록처럼 잘 알 수 없는 신비한 주님으로부터 볼거리를 찾았음을 읽게 된다.

또 수없이 표적을 본 사람들은 과연 표적을 기뻐하고 믿었는가 하면 오히려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5병2어의 기적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6)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이미 아셨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라고 지적하신 바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행하신 표적이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고 요한 사도는 말한바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사실 예수께서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니셨다. 다만 그 기적들은 예수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하는 방편 즉, 수단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에서 요한 사도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기적을 봐야 믿겠다는 자세는 사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이 아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기적을 필요로 할 만큼 힘겹고 답답할지라도 나(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나(우리)에게 생명이시고 소망이시다.



Ⅱ. 날씨를 예보하는 것은 이제 거의 정확하다.(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우리가 푯대 세움 말씀으로 선택한 누가복음 역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눅12:54~55)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역사가 반복 되어 오면서 일어났던 일들의 통계를 통해서 사람들은 나타날 현상들을 예측하는 일들은 사실 상당히 오래되었고 앞으로 4차 산업을 이끌 매체가 빅 데이터(Big data) 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2) 당시에 오늘과 같은 기상에 관한 전문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과 같이 공해를 일으키는 요소들이 없고 날씨의 변덕이 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구름 없이 붉게 물드는 저녁놀은 이변이 없는 한 다음 날이 맑으리라는 예측을 할 수 있었음을 그대로 말씀하신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3f) 하셨는데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구름이 깔리면서 아침햇살이 가려지고 붉은 구름으로 보인다면 당연히 날씨가 궂을 것이라는 기상관측은 가능한 이치였다.

우리가 어렸을 때도 어느 달에 뇌성번개가 치면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고 이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보다 훨씬 정확한 일기예보를 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과거의 많은 데이터를 활용하는 덕택이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눅12:54~55)는 말씀도 소나기가 올 징조나 더위가 심할 징조들 역시 오늘과 같이 자연이 손상되어서 기복이 심한 날씨가 아닌 당시의 상황에서 예측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일기예보에 대한 정확성이 1세기보다 훨씬 더 정확해져서 태풍의 발생에서부터 이동경로까지 예측을 해 내는 것을 보면 실로 놀랄 정도이다. 과거의 자료들을 슈퍼컴퓨터를 통해서 모으고 축적해서 예측을 해 내는 사람들의 지혜는 하나님께 대한 경이로움만큼이나 놀랄 정도로 인간의 기술이 발달되고 있다.

농경문화 속에서 이런 기상의 예측이 매일의 삶의 활동과 일에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육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날씨에 민감했던 사람들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데서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다른 측면 즉, 영혼에 관련된 민감성을 일깨우고 계신 것이다.

농사를 짓지 않는 오늘의 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TV이든지 스마트폰을 통해서 ‘오늘 날씨가 얼마나 추울까, 미세먼지는 활동하는데 문제가 없을까 예보를 확인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미세먼지 같은 부분은 적어도 10년정도 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면 ‘오늘 날씨가, 미세먼지가, 온도가 어떨까?’ 라는 궁금증 못지않게 처한 영적인 세계의 전망에 대해서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도 점검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메시지와 올 한 해의 푯대 세움 말씀은 우리가 일기예보를 보기 위해 TV나 라디오 스마트폰을 키는 만큼 영적인 세계에 민감할 수 있어야 함을 오늘 주님께서 경계로 주시는 교훈이다.



Ⅲ.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꾸지람을 듣는다.(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12:56)

‘악하고 음란한 세대, 외식하는 자여’라는 이 두 곳의 말씀 모두가 우리가 별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다. 이러한 주님의 한탄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탄식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사람들에게 어던 존재이신가를 안다고 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면 책망이다.

영적인 세계와 사람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를 알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의식하며 기쁘시게 하는 행동인가를 어느 정도 아는 이들이 하나님의 바라심이나 기대에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을 때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 해서라도 바른 영혼의 사람으로 세우고자 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권면이다.

지금 우리 주님께서 어느 다른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의 나라를 여행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긍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소원성취만을 기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나마 주님을 찾고 따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런 표현을 쓰고 계심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가운데서 항상 하나님의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항상 어느 것이 자신에게 유익인가를 저울질하는 그래서 여차하면 섬기는 자신의 경배의 대상도 바꿔 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하여 광야를 여행하면서 항상 보여왔던 그들의 조상들의 모습이었고 나중 가나안에 정착하여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을 세운 후에도 여전하다가 결국 바벨론에 70년이라는 긴 포로생활을 하고 돌아와 정착한 후에도 이런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표현은 이런 대상에게 OT성경에서 항상 표현되어 왔던 별명이었다. 구체적인 예를 보면 새로운 언약을 주시기 위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말씀을 인용하면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32)고 한탄하신다.

‘음란’은 올바르지 못한 부부 관계를 지칭하는 표현이고 그런 입장에서 OT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남편이었던 하나님을 뒤로 돌려두고 다른 섬김의 대상을 찾을 때 ‘음란하게’ 라는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경계는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을 때 아론과 이스라엘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직후에 주고 있는 내용을 출애굽기34:15b, 16b[…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에서 볼 수 있다.

레위기20:5~6과 나중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갔던 이스라엘에게도 계속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겔23:30)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표현은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일들이 있었던 세대의 대부분이 이런 상태에 젖어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이나 언약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육신적인 유익만을 위해서 하나님을 바꿔 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없는 ‘악하다’는 표현이 ‘음란’을 수식하며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식하는 자’ 역시 종교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는 위선자를 일컫는 말이다. 겉에 그럴싸한 것을 뒤집어써서 사실적인 모습을 감추고 마치 자신이 아닌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두고 사용되는 낱말이다.

본문에 나타나는 것은 영적인 지도자라고 하면서 그 영적인 세계가 어떻게 되어가는 줄도 모르는 채로 오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잘 순종하고 쓰임 받는 사람인양 거짓으로 꾸미는 모습을 이름이다.

결국 주님께서는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4)는 표현을 마태는 기록해주고 있는데 책망은 물론이지만 상황적으로도 비극을 불러오고 만다.

왜 OT에 나타난 표적이 요나의 표적뿐인가! 홍해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역사에서 비롯해서,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일이라든지 예수께서 직접 언급하신 사렙다 과부의 떡 반죽 그릇,(눅4:26) 나아만의 나병치료(눅4:27), 남편을 잃은 선지자 생도부인의 기름병의 기적(왕하4:1~7)은 물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한가지 예수님의 오병이어(五餠二魚) 같은 기적의 예를 든다면 엘리사 때에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왕하4:42~44)는 수많은 기적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요나가 표적으로 3일 밤과 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다가 다시 나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니느웨에 전한 표적을 언급하시는 것은 이 요나의 표적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나타난 표적이라는 데서 불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신으로 인한 표적이면서 그들을 위해서도 자신이 죽어 장사되고 3일 3야를 땅속에 묻혀있다가 부활하실 구속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예언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대상이 어떠하든지 항상 진실하셨고 비록 거짓된 사람들이 욕심과 허영으로 기적을 요구했을지라도 여전히 진실하셨음을 여기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경계로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은 오늘 마지막 말씀이다. “…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4b) 즉, “악하고 음란한 세대들과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못하므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으셔서 그들을 떠나 가셨다.’는 결과이다.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은 그의 백성이건 또는 그의 백성들이 아님에 상관없이 말씀 하시지만 그에 대한 반응이 중요함을 배운다. 내(우리)가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우리의 자세에 따라서 같은 반응을 보이실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는 있지만 말씀에 합당한 순종을 드리지 못한다면 주님은 떠나실 수 밖에 없다. 즉, 함께 계실 수 없다.

표적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는 이제 확증되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날씨를 궁금해 하는 것 못지 않게 영적인 세계와 우리 각자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꾸지람일지라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하면 생명이 되지만 불순종하고 계속 세상과 타협하며 위선적인 음란한 신앙을 계속 한다면 주님은 떠나실 수 밖에 없다.

어떠한 경우라도 주님께서 우리 곁에 머무실 수 있는 겸손과 순종을 가지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귀중히 기다리며 준비하는 올 한 해가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