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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창 35:1~7 2018-01-14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야곱은 20년간의 외삼촌의 양을 치면서 처가생활을 하다가 부모가 보고 싶고 고향이 그리워 돌아오지만 첫 번째의 걱정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복을 훔쳐 받은 것으로 형(兄) 에서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여 하나님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낸다.

이런 과정에서 형의 분노는 삭아지고 화해되고 홀로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떠나갔던 가나안 땅을 4명의 아내와 11아들과 함께 종들과 많은 가축을 거느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 온다. 세겜에 여장을 푼 야곱의 가족들은 하몰의 아들들에게 100크시타라는 액수의 돈을 주고 땅까지 사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안정된 삶을 시작하였다.

한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야곱이 가나안을 떠날 때 눈이 어두워 큰아들과 작은 아들을 구분하지 못했던 이삭이 20여년이 지난 그 때도 아직 살아 있었지만 야곱이 가나안에 돌아 왔음에도 이삭을 찾았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나중 세상을 떠난 때에야 형 에서와 함께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나타난다.(35:29)

그러나 모든 인생이 그렇듯이 야곱 집안의 일이 계속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문제의 시작은 야곱의 딸 디나[레아의 스불론(거함, 6th) 다음 낳은 외동딸]가 그 땅의 여자들을 보러 갔다가 그 땅의 추장인 세겜이 디나를 사랑해서 옳지 못한 방법으로 야곱과 아들들의 분노를 사게 되고 거기에 이어지는 사건들이 불거지면서 야곱은 가나안 가운데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고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 일에 개입하시는 상황을 본문에서 읽었다.

우리는 때로 ‘세상이 죄악 되고 악하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세상에 대응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사실 그런 판단과 생각 때문에 오늘 우리 신앙의 사람들이 가나안 같은 죄악 된 세상에서 어떠한 자세로 위기를 면할 수 있는 가를 교훈적으로 배우게 된다.

분명히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의로우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고 우리 죄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져주신 분이시지만 그분을 섬긴다는 우리가 바르지 못한 삶으로 야곱처럼 거처하고 있는 가나안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욕을 돌리고 있는 것 때문에 세상에서 존립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도 이러한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우리들의 부족으로 잘못 적용하고 나타냄으로 세상에 공분(公憤)을 불러 일으키는 신앙의 위기 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우리의 머리로는 불가능하고 몇 천 년의 역사가 지났지만 이러한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실제적인 해결방법이 될 줄로 믿는다.



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은 자신의 자녀들, 대표적으로는 시므온과 레위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의 잘못으로 절망하듯 책망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듣는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34:30)

어쩌면 이 야곱의 고백이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고 다만 오늘은 시므온과 레위가 아닌 우리 모두의 전체적인 잘못으로 빛(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이요 향기(고후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여야 할 그리스도인이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세상은 우리에게 욕설을 퍼붓고 교회에서는 사람이 떠나는 상황 속에 새해가 밝았다고 소망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위기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소망도 비전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위기 속에서 먼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해결 방안을 제사하고 있는 내용을 읽어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보다도 위기 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항상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평안 가운데서도 계속 평안을 지켜갈 수 있도록 말씀을 주시는 것은 물론이지만 좌절과 절망 중에서도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이 감사 드려야 할 이유인데 비록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대방향으로 향하던 요나에게도, 몇 주간이나 풍랑으로 인하여 하늘과 별이 보이지 않던 풍랑 가운데 바울에게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이다.

위기와 두려움 가운데 있는 야곱에게 주시는 말씀이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당부하신다. 위기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살 수 있는 방법은 머뭇거림이 없이 일어나 “벧엘[하나님의 집]로 올라 가라”는 명령을 주신다.

이것은 단순히 지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시고 인류를 죄의 저주에서 자유 할 수 있게 한 후에는 어떤 특정 지역만이 하나님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끝나지 않는다.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라는 말씀이다. 결국 사람의 불행은 하나님의 집을 떠난 데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회복하고 그 회복된 삶 속에 거하는 즉, 그 속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사모해서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기는 하였지만 아버지 곁을 떠난 것이 어쩌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게 한 이유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위기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순종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처럼 진리를 순종하는 데서 떠나 우리가 좋은 데로 떠도는 것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회복(환원)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과거를 회상시키시면서 이러한 당부를 주고 계신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 일생일대의 위기 속에서 만나 주셨던 하나님을 다시 만나보라고 당부하신다.

그냥 일어나서 만나보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너의 문제점을 그대로 가지고 올라가되 여기에 주는 2가지의 당부가 바로 “거기 거주하며,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는 것이었는데 이 한 절 속에 두 가지 명령은 우리의 근본적인 삶의 회복을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집에 살고 예배하라!”는 교훈이다. 이를 바꾸어 표현해도 마찬가지인데 이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살아라!, 주님을 예배하는 것과 삶이 같아야 한다.”는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왜 야곱 가족이 위기를 만나게 되었는가를 찾아 보는 것과 같다. 그들은 거룩한 할례의 언약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죽였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거룩한 계명과 말씀을 예배와 삶에 같이 적용하지 못하고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세상사람(당시 가나안)들로부터 위기를 만나게 된 원인이다.

그럼으로 오늘 첫 번째로 주님께서 주시는 명령인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는 교훈은 이중적인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의 집에 살며 예배하는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하나로 살라는 말씀이다.



Ⅱ. 하나님을 만났던 곳으로 돌아가자,(2~4)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당시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는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체적으로 야곱의 가족들이 행해야 할 과제들이 다음으로 주어지고 있다. 야곱은 살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이를 가족들과 함께 실천하였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2)

이것은 야곱만이 아니다.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즉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뜻을 맞추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각오가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집(딤전3:15)의 가족이라면 예외가 없다.

첫 번째는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이다. 당시는 여호와 신앙을 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위하고 의지하는 것들이 더러 있었다.(창31”:19-드라빔)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모든 우상을 우리의 삶에서 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두 번째는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다시 우리 삶에서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한 부분들을 깨끗게 하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삶을 고치는 문제, 죄를 해결하는 문제들이 바로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없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오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복음을 순종하는 우리에게는 확실한 죄의 해결의 방법을 주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우리의 삶이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정결하도록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합당하도록 정결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기도와 삶에서 의로운 싸움을 시작하고 계속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이것은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 삶의 구체적인 모습도 바꿔야 한다는 명령이다. 하나님의 백성 됨의 모습이 없이 세상 말로 그야말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이란 표현처럼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은 모습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고치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야곱은 가족들에게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 야곱은 이미 자신의 어려움과 위기를 해결해 주셨던 과거의 경험을 그의 가족들에게 돌아보며 고백하고 있다.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이 말씀도 구체적으로 많은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어려운 말이 아니다.

이렇게 가족들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야곱의 당부를 모든 가족들이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다음절이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4)

쉬운 격언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는데 신앙은 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좋고 바른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고 부탁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귀로 듣고 흘려버리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고 생명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나중 하나님 앞에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우상이 될법한 모든 것은 그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귀걸이까지라도 내려 놓고 꾸밈없이 자신의 단장을 제하고 하나님의 집인 벧엘로 올라가는 모습이야말로 참 예배자의 자세이다. 하나님 앞에 중요한 매무새는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점검하는 외에는 세상에 가치 있는 어떤 것도 벗어야 한다. 이럴 때에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를 고치시며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비록 세상에서 값이 나가고 귀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 버릴 수 있는 실제적인 자세야말로 예배를 위한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Ⅲ. 하나님께서 저들을 받으시고 힘을 주신다.(5~7)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철저하여 자신들을 하나님께 맡길 때 비로소 하나님은 역사를 시작하심을 본다.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5) 당시 가나안은 작은 부족국가들로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야곱의 아들들이 행한 일들은 자신들이 보기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속여 세겜 부족의 씨를 말린 행위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이런 당시의 위기를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야곱이 사실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로 회복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족들을 보호하시는 방법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떠났으나” 라는 표현은 거짓되고 야비한 행동을 버렸다는 것과 같고 결론적으로는 모든 하나님 외에 자신들을 의지하는 것들로부터 떠났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결과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려움은 어떤 담대한 사람들도 감당할 수 없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려움이 성경이 더러 나타나지만 대표적으로 여호수아2:9에 보면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들에게 기생 라합이 자신의 여리고 백성들의 모습을 묘사하기를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당연히 그 결과는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5b)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무서운 대상일지라도 얏 보일 수 있고 그림자 하나를 보고도 놀라고 떨 수 있는 사람의 마음 상태는 하나님께서 좌우 하실 수 있다.

아직 어린 다윗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셨기 때문에 거인이었던 골리앗도 자신이 그 동안 양을 지키며 잡아 죽였던 사나운 동물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도록 용기를 주셨던 하나님은 그를 순종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주님의 백성들의 움직이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을 주셔서 스스로 절망하게 했다.

마침내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6) 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그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빈틈없이 이루어졌음을 읽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즉, 계명은 순종만 한다면 절대로 어긋남이 없는 것은 그 약속 자체가 생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벧엘에 어떤 사람들의 방해도 없이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결과는 야곱의 지혜에서나 그의 가족 중 어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순종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7) 이 말씀은 그들이 순종하여 얻은 결과이면서 과거의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들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 같은 가나안 지역을 거쳐서 비로소 과거 위기 때에 야곱을 만나 소망의 약속을 주셨던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고 자신들을 위기와 절망으로부터 지켜주신 하나님께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라는 모습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의 두려움과 위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바로 그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보호를 받을 수 있음에 감격한 야곱은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즘 말로 이 말을 표현하면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다.

그런 다음에 다시 과거의 경험을 한번 더 되새긴다.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7b) 여기에 중심이 되는 의미는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는 것인데 ‘위기와 절망의 막다른 장소에서 자신에게 나타내 주신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같은 어려움 속에서 수 천년 전부터 성경 속에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조상들, 우리 각자의 과거의 삶의 고비에 나타나 주셨던 하나님을 돌아보아 오늘 현실의 어려움과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 때 그렇게 나타나셔서 해결해 주셨던 하나님 오늘도 같은 순종을 드린다면 같은 결과를 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확신이요 결론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나 우리에게 “벧엘로 올라가라!”명하셨고 야곱이 이 명령에 순종하려고 했던 것은 가장 어려울 때 자신을 만나주시고 문제를 해결 받았던 과거의 신앙체험을 다시 회복하라시는 명령이다.

오늘 우리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야곱의 가족들이 신앙의 말씀을 잘못 사용하는 것으로 인하여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으로 인해 세상에서 겪는 위기 중에서 그 어려움을 회복해야 할 상황에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 예배하고 그 예배가 삶 속에서도 나타나도록 격려하시는 음성을 야곱과 같이 듣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과제들이 있는데 하나님보다 더 귀하거나 좋게 여기는 어떤 우상이든지 버리고 신앙의 순결을 다시 회복하고 우리가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바르게 고쳐 입을 것을 명령하신다.

그렇게 행했을 때 두려워했던 주변 세상이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함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삶이 회복된 것을 야곱의 가족에게서 보는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가 이루어질 것을 확신화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