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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마 23:27~28 2018-01-2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  
올해의 푯대 세움 말씀인 누가복음 12:56에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하는 내용에서 맨 앞에 “외식하는 자여!”라는 대상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말씀이 마태복음 23장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육신으로 계실 때에 이런 책망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오늘도 이런 경계는 다르지 않고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지라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외식하는 자여!”라는 말을 듣고 행복해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으로부터 이 말을 들어도 거기까지는 괜찮다.(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해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주님께 이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비극이고 끝이다. 그러므로 이런 별로 행복하지 못한 제목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는 이런 비극적인 표현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다.

“외식하는 자여!” ‘외식[ὑποκριτής, 휘포크리테스]’을 쉽게 표현하면 ‘탤런트’ 즉, ‘연기자, 배우’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세상에서는 사실 연기자가 인기가 있고 연기를 잘하는 유명한 사람들은 사람들의 우상이 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어 영광을 얻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사실이다.

연기자들은 자신의 삶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기하는 배역의 삶과 자신의 삶이 관계가 없고 자신의 본연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는 연기하던 배역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은 그것이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자의 삶이 자신과 전혀 다른 이중적인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고 특히 그것이 신앙의 삶과 더불어 이해할 때는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수께서 “외식하는 자여!”라고 책망하신 사람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 신앙의 모범이 되어야 할 지도자들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맡겨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된 모범이 되어야 할 지도자들이 사람들이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다른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자세 때문이었고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항상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만 거룩한 척하여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로 행복한 주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사람들로부터나 특히 주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여!” 라는 책망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과거의 주님께 직접 이러한 책망을 들었던 사람들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바르게 고치므로 시대의 징조를 구분하고 주님의 다시 오심 앞에 준비하는 하늘의 백성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Ⅰ. 두 가지의 삶이 있을 뿐이다.(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 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역시 우리 주님의 비유는 항상 적절한 내용에 사용하신다. 지난번에 기적을 요구하는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OT의 수많은 기적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으로 인하여 있었던 요나의 표적을 예로 드신 주님의 뜻을 생각했었다.

하나님을 바로 의식하지 못하고 화를 당할 대상을 향하여서는 무덤을 비유로 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의미를 가진다. 사실 무덤은 절대로 생산적이지 못하고 절망적인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는 가장 신성시 여기고 근엄하게 꾸미는 장소라고 하는 데서 무덤의 비유는 바로 잘 못 신앙하는 종교 세계에 적절한 비유일 것이다.

책망 받을 대상을 무덤으로 비유하시는데 무덤은 삶이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는 죽음의 장소이다. 책망을 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손으로 베껴 쓰고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들로 적어도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자신들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다 보니 그런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는 그들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도록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책망을 하실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이 마태복음 23장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15) 라는 책망을 듣고 있는 것을 함께 읽을 수 있다.

생명이 풍성하신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장소인 무덤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사실적인 비유를 “회 칠한 무덤 같으니” 라고 비유하셨다. 어느 나라나 문화를 막론하고 죽음은 신성시 여기고 무덤을 잘 꾸미는 것으로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는 것은 거의 같다. 그러나 아무리 정결하고 아름답게 꾸며도 무덤은 죽음이고 생명이 없다.

사실 신앙을 잘하는 것은 무덤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사람들을 불러내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쩌면 신앙이 잘못되면 생명의 방주인 교회라고 하는 곳도 무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성은 어느 곳, 어느 때나 가능하다. 이런 입장에서 교회가 무덤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무덤도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하신 것처럼 아름다운 돌과 잔디를 잘 기르고 꽃으로 꾸미는 일은 거의 일반적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생명이 없는 종교일수록 그럴싸해서 경건의 모양을 꾸미는 것이 사실이다.

명칭이든지 보이는 환경이든지 그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 때문에 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수 없어서 로마의 도시 건설을 위해 모래를 파낸 지하 카타콤 동굴 어두움 속에서 관솔불이나 기름불을 키고 예배를 드리는 까닭에 코 밑이 그으름으로 까맣게 그으르고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해서 얼굴들이 창백했지만 그들의 믿음과 확신은 역사 속에 수없이 도전을 줄 만큼 경건한 삶이었다.

사실 보이는 그럴싸한 아름다움은 무덤뿐만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많은 종교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 1세기 때도 이런 종교적인 내용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계하기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3)는 경계를 주기도 했었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겉모양만 무덤처럼 경건하고 생명이 없는 데서 회의감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더 그럴싸한 동양의 신비종교에 매력을 느끼고 삶을 팽개치고 동양의 신비종교로 심취하는 일들이 과거에서부터 지금은 미국의 사람들간에도 바람처럼 불고 있다. 이런 종교의 변화로 일어나고 있는 운동이 New Age Movement 나 Post Modernism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생명을 잃어버린 회 칠한 무덤 같은 종교생활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우리 예배당도 나중에는 어떤 다른 용도의 장소로 사용되고 말 것이다.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비록 비유이긴 하지만 무덤의 좀더 사실적인 면을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충분히 짐작은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주님께서 “그 안에는”이라는 보이지 않는 면을 말씀하신다.

어쩌면 이 비유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리고 능력을 상실한 우리 각자나 교회나 가정들의 신앙의 다른 면을 비유하고 계신 데서 두려움을 갖게 된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무덤의 겉모양처럼 경건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裏面) 보이지 않는 면에 나타날 수 있는 사실적인 모습이라는 말이다.

마치 사람을 무덤에 묻으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수순들이 우리들 속에 그대로 나타날 수 있다는 비유인데 그런 근본적인 이유는 생명을 잃어버린 신앙의 삶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반면에 항상 주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구원의 감격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신앙을 가르치는 전도자의 가정이라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니 매일 부부간에 불화하고 강단에 설 때와는 다르게 비굴하고 추하고 하루하루 지옥을 사는 것 같은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죽음이 충만한 무덤 같은 이면이 있을 수 있다.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하셨는데 이 모든 것들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이 이중적이고 불경건 하게 되면 은혜와 생명이 충만하지 못하고 겉모양과는 다르게 그 이면에는 무덤 속처럼 섬뜩하고 냄새 나고 생명 있는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 가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하면 신앙이 사실적인 삶이 되지 못하고 단순히 연기하는 것처럼 하다 보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주님의 경고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신앙하는 삶의 선택을 단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우리 각자가 신앙의 연기자들인가 사실적인 그리스도인인가 즉, ①참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②그리스도인 연기자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신앙을 다만 연기자로 살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감사해야 할 것은 그것을 오늘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런 교훈을 주시고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다행히도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기회는 계속 주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너무 늦지 말아야 한다.



Ⅱ. 이런 두 부류는 언제나 있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약 3년간의 12제자들을 훈련하시고 십자가의 사역을 준비 하실 당시에 주님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그 약속을 누리는 사람들로 살지 못했던 것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셨던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었지만 더 심각한 모습은 주님께서 성전에 가셨을 때 더 마음 아파하시고 책망을 하셨다.

공관복음에서 한결같이 탄식하신 내용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마21:13; 막11:17; 눅19:46)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어떤 면에서는 주님께서 인정하시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부정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2:16) 라고 조금은 다른 표현으로 역시 책망하셨음을 본다.

①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그랬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은 비단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능력의 말씀임을 믿고 두려워하여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순종하여 생명을 약속대로 누리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런 사람들은 소수일 뿐이었다.

이집트를 탈출해 나올 때부터 광야에서는 물론이고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이후에도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은 역시 그대로 있었고 심지어는 불순종한 것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가서도 그랬고 하나님의 긍휼로 70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도 하나님의 백성 속에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타났다.

에스라를 통해서 신앙을 말씀으로 회복하자고 하는 이스라엘 방백들과 백성들의 각오와 결심에도 그것을 한사코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돕더라”(스10:15) 이런 일은 어느 때나 있는 사건이다.

②예수 당시의 사람들도 그랬고 오늘도 다르지 않다. 사실 그런 이유에서 오늘 본문 같은 내용이 나오게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국가 속에서나, 오늘 날의 교회 속에서도 어쩌면 이러한 차이를 가지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과거의 역사를 돌아 볼 때 모르긴 해도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도 계속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 각자 나 자신이 어떤 쪽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결코 행복할 수 없는 말씀을 나누게 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우리들 만이라도 “외식하는 자여!”라는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언제나 빛과 어두움은 변함없이 역사 속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어두운 데서 불러내 기이한 빛에 들어간 자들이 되었고 이러한 귀중한 신앙적 삶과 체험을 통해서 또 다른 어두움에 붙잡힌 사람들을 빛으로 불러내는 귀중한 역할을 우리 자신이 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전하라는 당부를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듣는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이것은 우리를 부르신 주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부르심에 반응하는 각자의 순종의 차이에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Ⅲ. 이것은 사실과 흉내를 내는 것의 차이이다.(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어떤 삶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과 그 삶 자체와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인척 연기하는 것과는 주님께서 보실 때는 전혀 다르다.     안타깝게도 많은 세월 속에 하나님의 약속에 거한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감 즉, 믿음을 온전히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드시 그럴까?’라거나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반신반의 하는 불완전한 믿음으로 인하여 저울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여차하면 자신의 유리한 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행동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는 경계를 주고 있다.

때로 사람들은 흉내를 사실 같이 연기할 때가 있고 TV나 영화에서 인기 있는 배우들은 사실 그래야 계속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업적인 연기를 책망하고자 “외식하는 자여!”라 하신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삶에 있어서 진실되지 못하고 이중적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신앙의 사람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는 무덤의 비유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겉에는 온 갓 아름다운 돌들로 꾸미고 회를 발라서 깨끗하고 거룩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 속에는 썩어가는 냄새와 섬뜩한 뼈와 죽음이 가득한 것을 우리의 삶에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도 겉으로는” 사실 겉모양도 중요하다. 그러나 주님이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속도 깨끗하고 진실되기를 바라신다. 사람들은 자신은 진실되지 못할지라도 세상이나 사람들은 진실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어쩌면 사람들에게는 속이면서도 기적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이 마술이다. 상대방의 눈을 속여서 대단한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끊임없이 훈련하고 노련하게 연습해서 공연을 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눈을 속이는 것인 줄 알면서도 사실인 것처럼 신기하게 여긴다. 그러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연기하는 것이나 마술은 앞에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들 즉, 관중들에게는 그럴싸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마술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뒤에서 그 속임을 그럴싸하게 꾸미는 무대장치를 함께 하는 자들은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심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고 그분을 섬긴다고 하는 우리 각자의 본래의 자세를 너무나 분명히 아시는 분이시다.

신앙은 사람에게만 옳게 보이면 되는 마술이나 무대의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시간과 상황 속에 함께 하셔서 시작과 끝을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의 하나하나나 말 한마디한마디의 진실성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 이런 말씀을 듣고 볼 때 진실을 행한 사람들은 감사와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그럴싸하게 행동할 수 있지만 나(우리)를 사랑하시고 나(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져주신 주님께서 보실 때는 연극이고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것으로 넘치는 안타까움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물론이고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적 행위; 이렇게 예배를 드린다든가 주님을 위한 어떤 일을 한다든지 그것이 진심이 아닌 흉내를 내거나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이 아닌 불법을 행하기를 원한다면 당장에 주님께서 그럼 사람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여!”라고 책망하실 것이다.

신앙하는 우리의 삶은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주님께서 보실 때 어떨까를 의식하며 사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우리와 꼭 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계실 때에도 그렇지만 오늘 우리의 삶의 안과 밖을 마음과 행동을 함께 보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다를 때 주님께서 “외식하는 자여!”라고 책망하실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의식하며 거기에 대한 상급을 주실 분이심을 믿고 행동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것임을 너무나 분명히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느 때에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행동의 이유가 주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희생을 의식하여 하는 것들이라면 책망이 아니라 칭찬도 주어지고 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1)

신앙의 삶이나 행동은 흉내 내고 연기하는 것을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안팎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보시고 계신다. 지금까지의 신앙이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었다면 회개하고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안팎으로 하나된 삶이 되어서 책망보다는 칭찬과 영광을 누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