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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롬 3:21~26 2018-01-28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오늘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귀중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함께 그 사랑과 은혜가 죄인 된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오게 하는가 하는 신앙의 중요한 부분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로마서의 전체 주제가 죄인이 어떻게 의인되는가를 가르치는 귀중한 신앙의 체계를 제공하는 귀중한 생명의 교훈이다.

어느 인종이나 사람들을 막론하고 죄를 해결하고 신(神)의 영광의 경지에 이르러 질병과 죽음을 해결하고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것이 어느 곳 어느 때를 막론하고 먹고 사는 문제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 왔고 에덴의 영광을 떠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류에게 최종적인 종교와 도덕의 목표였다.

그런 많은 관심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사람 자신의 수행이나 많은 종교적 노력은 확실한 결과나 확신을 얻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많은 종교들은 막연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자신들의 방법과 노력으로 이것을 극복해보려고 지금도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애쓰고 있다.

이 문제야말로 사람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방법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왔고 그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이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살게 하시며 최종적으로 돌아가야 할 하나님 만이 사람의 구조와 인생의 비극의 근본적인 문제를 아실 뿐 아니라 역시 해결책도 가지고 계심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 사실 자체가 조금은 독선처럼 들리지만 당연한 것은 어떤 것이든지 그것을 있게 한 만든 이가 문제도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가장 일반적인 이해에서 사람의 안타까운 문제에 대한 접근도 해야만 한다.

역사 속에 가장 분명한 계시와 성취를 이룬 내용들이 성경의 내용에서 분명하고 사람이 만든 다른 경전과 다른 것을 이런 부분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도 살짝 이런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창조주요 비극을 해결해 주시려고 주신 계시와 성취가 오늘 이 시간 속에 나에게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나의 것이 되지 못하면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에 38년을 누워 자신의 중풍을 치료하려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원망하는 모습은 어쩌면 모든 인류의 탄식일 것이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5:7)

이 고백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원망도 썩여있는 말이다. 결국 스스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중병은 누군가 도움 없이는 스스로 어쩔 수 없다는 구원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외부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고 그것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 구원을 위한 사실적인 고백이다.

그런 입장에서 성경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역사와 그의 사람들을 이끄시고 구원한 일들이 있지만 그 은혜의 역사를 이스라엘이나 유대민족이 아닌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의미를 찾고 누리는 귀중한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Ⅰ. 하나님께서 주신 최종적인 기회.(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메시야 약속을 받은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인 즉,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다는 비극적인 상황을 바울은 이 로마서 1~3장 첫 부분까지 증거하는데 사람의 죄인 됨과 그것이 심지어는 율법을 받았다고 하는 유대인 조차도 결코 다를 것이 없는 선언을 이 로마서 3장 앞부분에서 선언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9~12)

사람들 중에서는 의인으로 보이는 사람이나 나름대로 창조주를 찾으려는 종교행위나 선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보이고 그래서 죄악이 범람하는 현재의 시대에서도 그런 것을 보면서 위안하기를 “그래도 아직 살맛 나는 세상이다.” 라고 말하고 하는데 성경은 이런 모든 것을 거절하는 것으로 선언한다.

사람들은 이런 선언을 독선적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상대적인 인간의 비교 속에서 더 낫다는 것뿐이고 사람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별 차이가 없고 인정하실 수 있는 의인이나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다는 선언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첫 절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 드디어 빛이 비치고 있는데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21f) 라고 한 것이다. 사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주신 법이 아니다.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주시기 위해 선택된 백성들에게 주신 임시조치법에 불과하였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것이지만 사실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즉,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법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법이었다. 이법이 쉽게 말하면 모든 OT성경이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이 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실 때 폐기되기 위하여 함께 십자가에 못 막아 없어진 법이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2:14)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임시조치법의 어떤 조항들을 생명의 법이 주어진 이 시대에도 지키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시도이다.

그어나 오늘 본문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21f) 라는 말씀은 이 율법만이 아닌 인류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적 계율과 법조문들을 모두 일컫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아무리 그럴싸한 종교나 계명이 있었다고 해도 이제는 그런 것들 외에 한 의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1b) 그리고 그 주어진 의는 비록 임시조치법이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던 모든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확실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 받은 것을 확실히 증언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22f) 하나님께서 과거의 모든 사람들과의 중보자들을 이제는 한 통로만으로 소통하게 하셨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1:1~2f)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모든 복의 통로요 감사와 찬양의 통로요 예배의 통로자로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말미암아’는 “믿음으로”라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이 새로운 언약의 대상을 말씀하시는데 “…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b)고 확인하고 있다. 이제 선택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과거에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도 상관하지 않는다. 또 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나이에도 상관이 없다.

현재의 자신의 비극적인 형벌 받을 죄인이라는 절망적인 상태를 깨달을 수 있고 죄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곳에서 돌이킬 수 있는 회개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연령에 한계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감상적이거나 고상한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방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이것을 거절하면 다른 방법이 또 있는 것이 아닌 마지막 최후통첩이라는 의미이다.



Ⅱ. 비극에서 영광으로,(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귀한 생명의 약속이 선언되고 이제는 다시 우리 현실로 돌아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23f) 참으로 비극적인 선언이지만 이것은 어떤 감상주의자인 사람의 평가나 짐작이 아니다. 바로 사람의 창조자요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선언이라는데 무게와 두려움이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가졌으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사실이다. 율법 속에서부터 이것은 강조되고 있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24:16)하였고 이스라엘의 왕정시대에도 신실한 왕들은 이를 실천하였다.(대하25:4아마샤)

물론 죄로 인한 포로가 되어간 시기인 에스겔을 통해서도 이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18:20)

아담이 죄의 통로를 열어 놓은 후에는 결국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고 그 죄의 결과는 인생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비극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것이 “…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b)라는 것이고 그럼에도 이 말씀 자체에 하나의 소망이 포함되어 있다. ‘못하더니’ 이 말은 다음의 나타날 역사를 준비하는 의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24)는 말은 본래 죄의 종으로 잡혀있는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몸값을 받고 해방된” 의미로 풀어 쓸 수 있다. “속량[ἀπολύτρωσις, 속전을 받고 해방시켜 주다, 몸값의 지불로 받은 해방; ἀπό ~부터, ~에게서 때문에; + λύτρον 몸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하다, ← λύω, 풀어주다, 놓아주다]”라는 의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b)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본다. 인간 측에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 들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값 없이 공짜로 받은 선물 즉,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받아 들이는 데는 사람이 할 바는 없지만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하고 이것은 우리의 이성적인 생각이나 감정보다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순종해야만 한다.

어떤 분이 깨끗하고 맛있는 음식을 주겠다고 하는데 온 갓 더러운 것들이 묻은 더러운 손으로 그 음식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이 확대해석 되면 안되겠지만 그런 이유에서 세상을 향해가던 삶을 돌이키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침례를 받아 죄 씻음을 받고 의인이 되어서 그 거듭난 사람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고 죄로 하나님과 불화하던 관계가 비로소 화평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 들이기 위한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조차 인간의 공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못하다. 이것이 인간 측의 공로 없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순종하는 사람들이 받는 데서 “얻은 자 되었느니라” 표현되고 있다.

이 땅에 최초로 성령이 오셔서 베드로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라고 확인해 주고 있음을 본다. 마가복음 말미에서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고 같은 확인을 해 주고 있다.

즉, 복음에는 이미 침례가 포함되어 있고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역시 침례를 받아 들이는 순종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인 예를 사도행전8:35~36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사53:7~)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로서 죄와 절망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값없이 주어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의인이 되게 하셨다.



Ⅲ.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다.(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고 마련하시고 시행하신 화목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온 인류의 죄를 씻을 희생제물로 준비하셨음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25f) 했는데 이것이 어떤 OT 율법 속에서의 제사나 방법이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이라는 부분도 지나칠 수 없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표현하기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20:28)라는 표현과 같이 여기에서도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이라는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25m) 아무리 크고 긴 인내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참으심에 비교할 수 없고, 아무리 보모가 자식의 허물과 실수와 불효를 참아 준다고 해도 하나님의 덮어 두심에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역사의 마지막에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베드로는 증언하고 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이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이고 배은망덕이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전적으로 우리 죄인 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을 위한 것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이 놀라운 희생의 역사(役事)는 죄와 저주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25b)

범죄하고 멸망할 인간의 타락은 사탄으로부터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에 대한 훼방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지만 사탄은 이것을 하나님의 불의로 몰아갈 수도 있고 그럴 뿐만 아니라 희생 없이 무조건 죄를 덮어버린다면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늘 십자가의 공의와 사랑의 양면성(兩面性)을 강조하게 된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26f) 결국 십자가의 피 흘림의 수치와 고통의 희생은 죄에 진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들어내는 것 또한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의 충족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인의 사죄를 강조하면서 계속해서 또 다른 강조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강조되는 표현이 역시 “…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6b)는 결과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 땅에 보내심에 좀더 중요한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2:14)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하나님을 거역한 이 우주에 공의를 온전히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꼭 같은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한결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를 범하지 않으시고 온전히 의로우실 뿐 아니라 죄 된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공의와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셨다.

최종적으로는 죄와 죽음의 원인인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12:9, 계20:2)를 비열한 방법이 아닌 하나님다우신 공의로 멸하시고 죄로 말미암아 아픔과 죽음과 저주를 풀어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사11:9, 65:25) 곳에 모든 순종하는 백성들을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실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 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최후 통첩이다. 순종하면 남, 여, 인종과 국경에 차별이 없이 영생이고 불순종하면 멸망이 있을 뿐이다.

이 한번의 온전한 역사로 죄와 저주로 고통 하던 죄인이 순종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여 영광에 이를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이루셨다.

이것은 단순히 죄인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우심도 나타내신 것이다.